“오색· 추곡약수터 대명당 정혈… 수맥 없다고 명당 아냐”
국내 수맥탐사 1895년 시작
아산 성당 프랑스 신부 전파
오색·추곡약수 수백년 건재
고창 예지리 경주 이씨 고택
안방자리 샘 솟아도 흉 없어
“수맥풍수로는 명당 못찾아”
우리나라의 수맥탐사는 1895년 아산 공세리 성당에 부임한 프랑스의 에밀 드비즈 신부(神父)가 전했다.그는 40년간 한국에 머물면서 추(錘)나 나무로 수 백 개의 수맥을 찾아주었고 신인식 신부가 그 수맥탐사의 방법을 이어 받았다.
서울 혜화동의 신학교에서 사목(司牧)의 길을 걷던 임응승은 교장으로 부임한 신인식에게 수맥탐사법을 배우게 된다.임응승은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많은 온천수와 지하수를 찾아냈으며 1979년 초에는 고흥의 소록도에서 20여 군데의 수맥을 찾아 소록도의 한센병 환자들이 생수를 먹을수 있게 하였다.1986년에는 ‘수맥과 풍수’를 출간하고 강좌를 통하여 수 많은 수맥인들을 배출하여 수맥탐사의 대중화를 이뤘다.
근년에는 수맥탐사로 물길을 잡을 뿐만 아니라 명당도 찾을 수 있다는,소위 ‘수맥풍수’를 자처하는 사람도 생겨났다.그러나 필자는 수맥탐사로 명당을 잡을 수 있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양양군 오색리에 소재한 오색약수.조선 중기인 1500년경 성국사의 승려가 약수를 발견하고 성국사 후원에 5가지 색의 꽃이 피는 신비한 나무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고도 하며 약수에서 5가지 맛이 난다고 해서 오색약수라 불렀다고도 한다.오색약수가 유명한 것은 약수의 약성이 뛰어나서만이 아니라 약수터가 대명당 혈처에 자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풍객의 판단이다.
춘천시 북산면 추곡리에 소재한 추곡약수.필자가 약수를 뜨는데 서너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미안한 생각이 들어 위쪽 약수터는 사람이 없으니 그쪽으로 가기를 권했더니, “우리는 기다렸다 이곳에서 약수를 뜨겠다”고 한다.아래 약수터에 사람이 더 많은 것도 명당파워가 더 좋기 때문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추곡약수는 1812년 김원보라는 사람이 꿈에 사명산 신령의 계시를 받고 약수를 발견했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철분 등의 여러가지 약성이 있다고 하는데, 붉은 색을 띠는 약수의 톡쏘는 맛이 일품이다.교통이 불편하고 의료시설이 미비했던 시절에는 여름 철이면 이곳에서 장기간 머물며 치병(治病)을 했던 사람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초등학교를 다닐 적에 선친을 따라와 점심 밥을 시켰는데 푸르스름한 밥 색깔에 식겁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수맥은 물을 지속적으로 공급받기 위해 자괴(自壞)작용을 하는데 자괴작용의 결과 건축 구조물에 금이 가고 아스팔트 도로도 갈라지게 한다.그러니 수맥에 걸린 집에 살면 인체에 해로운 영향을 주고 수맥에 걸린 봉분은 후손들에게 불행을 초래한다는 것이 수맥풍수의 논리다.
그러나 발견된지 수백년이 지난 오색약수터의 암반은 전혀 붕괴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추곡약수의 약성은 백년을 변함없이 건강에 좋은 약수를 제공하하고 있다.또한 샘물이 솟는다는 경주이씨 고택에 거주하는 사람은 건강을 해치기는 커녕 오히려 남보다 좋은 건강상태를 유지하고 있다.위의 사례는 수맥풍수의 이론이 맞지 않는 현장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필자가 전국을 다니며 답사한 수 많은 샘물과 약수터는 명당의 정혈에 자리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풍수를 대별하자면 길(吉)과 흉(凶) 뿐이다.봉분에 수맥이 흐르면 후손에게 불행한 영향을 준다는 수맥풍수의 주장은 흉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수맥에 걸리지 않았어도 흉지에 해당하는 묘소는 무수히 많다.풍수의 본령은 명당을 찾는 것이다.수맥풍수로 명당을 찾는다는 것은 오류가 생길 개연성이 많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