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주 묘소 대명당 위치 아들 김훈 작가 최고 반열 올라
명당과 흉지 간발의 차 공존
40세에 요절한 시인 신동엽
부모묘 맥로 걸린 흉지 영향

▲ 김광주 선생 묘소.양주 신세계공원 묘원 소재.
▲ 김광주 선생 묘소.양주 신세계공원 묘원 소재.
중학생 때,아버지께 ‘어디를 그렇게 다니십니까’라고 물었더니 ‘광야를 달리는 말이 마구간에 머물 수야 있겠느냐’라고 말했다.아버지는 우리가 숱하게 이사를 다녔는데 이사간 집을 모를 정도로 가정에 무심했다.이사 간 집에 찾아와서도 ‘배산임수’가 아니란 이유로 식구들을 타박했다.‘칼의 노래’의 작가 소훈의 아버지에 대한 회상이다.

김광주(金光洲·1910~1973년)는 수원 신풍동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제일고보 (경기고 전신)를 다녔다.1929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남양의대(南洋)에 입학했으나 중퇴하고 중국문학을 국내에 소개하는 한편 상하이를 배경으로 한 단편소설 ‘밤이 깊어갈 때’를 시작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한편 그는 백범 선생을 모시고 상하이와 충칭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한다.백범은 상하이 홍구공원에서 벌어지는 일본천황 생일연(장천절·1932년 4월)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결심한다.그 요원으로 윤봉길과 김광주 두 사람을 놓고 고심을 하였다고 한다.

해방이 되자 귀국한 그는 일간지의 문화부장과 편집국장 등을 역임했다.한국전쟁 후에는 당시 상황을 배경으로 ‘태양은 누구를 위하여’(1951년) ‘석방인’(1953년) 등의 작품을 쓰기도 했다.김광주가 장안의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것은 1961년 6월부터 경향신문에 연재를 시작한 ‘정협지(情俠誌)’였다.원작은 대만 작가의 ‘검해고홍(劍海孤鴻)’으로,50여 쪽의 짧은 내용을 그의 붓끝을 통해 450여 쪽의 내용으로 풍성하게 재창작됐다.이런 인기에 힘입어 동아일보에 ‘비호(飛虎))’등을 연재하면서 무협 소설의 붐을 일으켰다.또한 중국 유명 소설도 번역하였는데 필자가 초등학교 시절 처음 접한 삼국지가 바로 김광주의 번역본이었다.생소한 한자가 많았지만 가슴 설레며 읽은 장면들은 아직도 선연하다.

평생 장강대하(長江大河)의 술을 마시던 김광주는 병석에 눕게 됐다.연재 중이던 소설을 누워서 불렀고 김훈은 이 때 받아쓴 것이 훗날 문학적으로 도움이 많이 되었다고 한다.1973년, 5년간의 와병 끝에 김광주는 세상을 떠났다.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뒤, 묘지 값도 낼 수 없었던 김훈은 할부로 납부할 것을 약속했다.명당과 흉지가 간발의 차이는 공존한다.호리지차(毫釐之差)로 화복천리(禍福千里)라는 금낭경의 구절이 이런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김훈은 엄혹한 시절, 언론인의 자세를 견지하면서도 30년을 무탈하게 보냈다.그는 은퇴 후,‘칼의 노래’ ‘자전거 여행’ 등으로 작가로서 최고의 반열에 올랐다.대명당에 모신 부친의 묘소의 발음이 제대로 작동했다는 판단이다.

▲ 하단이 신동엽,상단이 부모 묘소.부여읍 능산리 소재.신동엽 묘소는 근동의 주혈로 김광주 묘소와 대등한 역량이다.
▲ 하단이 신동엽,상단이 부모 묘소.부여읍 능산리 소재.신동엽 묘소는 근동의 주혈로 김광주 묘소와 대등한 역량이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 중략 …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신동엽(申東曄·1930 ~19697)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껍데기는 가라’이다.혁명을 배반한 자들,외국의 허접한 이론과 문화의 외피를 뒤집어 쓴 자들을 모두 밀어내고 순수한 마음을 지닌 이들에 의해 ‘한라에서 백두까지’ ‘쇠붙이’(무기와 분단, 외세)를 내몰자고 선언한다.강한 메시지를 지녔음에도 메시지에 함몰되지 않고 ‘민중적 서정성’을 획득한 작품이란 평가다.신동엽은 일제의 수탈이 한창이던 1930년에 부여읍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우등상을 놓치지 않았다.가난한 집 수재들이 그러했듯이 그 또한 학비가 면제되는 전주사범에 입학한다.1948년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으나 3일만에 그만두고 단국대학에 입학한다.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그해 12월에 장정 50만명을 대상으로 국민방위군을 편성한다.신동엽도 이때 징집되었다가 이듬해 2월에 귀향하지만 몸은 만신창이가 되고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여 잡아먹은 민물게가 간디스토마의 병인(病因)이 되어 40이 안되는 나이에 요절하는 원인이 된다.

전쟁이 끝난 1953년 헌 책방에서 일하던 그는 아내 인병선을 만나 1956년에 결혼한다.아내가 양장점을 연 뒤 생활이 안정되자 그는 본격적으로 시인의 꿈을 키우지만 병마가 닥쳤다.본가에서 요양 중에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를 창작하여 신춘문예에 입선한다.신동엽은 40세로 세상을 뜨기까지 10년이라는 짧지만 숨차고 벅찬 문학생애였다.분단시대가 낳은 가장 빼어난 민족시인인 그의 작품은 음 세대로 이어가면서 가장 탐독되는 시편들을 이루고 있다’는 소설가 박태순의 평이다.

부모를 이런 명당에 모시면 자식이 요절할 수는 없는데… 안내판을 보니,신동엽은 부모님보다 먼저 사망하여 파주 월롱산에 모셨다가 1993년에 이곳으로 이장한 것이다. 만일 상단의 부모님 묘소가 주혈이라면 하단의 묘소는 주혈로 진입하는 맥로에 걸린 흉지에 해당한다.필자의 맥로이론 중 중요한 간법(看法)의 하나이다.
▲ 손건웅(孫健雄) 풍수유람가    ·춘천고등학교·강원대학교 졸업    ·네이버카페 ‘동강의 풍수유람’ 운영    ·저서 ‘세상을 풍수로 보다’ 외 1권
손건웅(孫健雄) 풍수유람가
 ·춘천고등학교·강원대학교 졸업
 ·네이버카페 ‘동강의 풍수유람’ 운영
 ·저서 ‘세상을 풍수로 보다’ 외 1권
저작권자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