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최고의 로펌 김앤장, 천하대지인 부친 묫바람 덕분
묘역안 4곳 대명당 중 3곳 선영 모셔
기운의 감에 난해한 풍수론 필요없어

▲ 김영무 부친 묘소.1993년 졸(卒)
▲ 김영무 부친 묘소.1993년 졸(卒)
김앤장은 1973년 김영무가 설립하고 같은 해 말 장수길이 합류하여 ‘김앤장’이란 이름이 만들어졌다.그리고 1979년에는 판사 출신 이재후가 합류하여 세 사람이 공동대표로 운영되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김앤장의 실질적인 오너는 김영무이다.그의 부친 김승현은 이승만 대통령의 주치의를 지낸 내과의사였고,그의 두 형은 미국 명문대 교수를,동생은 서울음대 학장을 역임했으니,김문의 발복은 김영무 증조부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추론된다.

김영무는 1942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고를 졸업하고 1963년 서울대학 재학 중에 사법시험에 차석으로 합격한다.연수원을 수료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그는 하버드 로스쿨에서 3년을 공부하여 한국인 최초로 정규학위(법무박사)를 취득하고 일리노이주 변호사 자격도 취득한다.미국과 일본 등의 국제 로펌에 근무하다 31세에 귀국하여 변호사를 개업했는데 그 때 합류한 것이 장수길이다.

장수길 판사는 71년 대통령 선거무효와 5·25총선 거부를 주장하며 신민당사로 들어가 농성했던 서울대생 10명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였다.이로 인하여 1973년 3월 정권에 의해 재임용에서 제외되는 실의의 시간을 보내던 시기였다.변호사 두 명이 시작한 김앤장의 출발은 단출했다.판검사 출신의 변호사들이 법정과 검찰청을 출입하던 시절,그들의 꿈은 남달랐다.한국 경제가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던 때,기업의 국제거래 자문이 무엇인지,로펌이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 법조계조차 인식이 미미하던 당시 김앤장은 서구식 로펌으로 가기 위한 시스템 구축을 염두에 두고 출발하였다.

시스템 구축을 위해 김앤장이 착수한 것은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우수한 인재를 지속적으로 영업하는 작업이었다.고시에 붙은 자식이 ‘판·검사 영감님’이 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부모들이 몸져 드러눕는 해프닝이 속출하는 가운데 ‘국제법무 전문 로펌’을 만든다는 취지에 공감한 특급 인재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1980년을 전후해 김앤장에 합류한 멤버들의 면면도 특출했다.이들은 법대 수석 입학, 졸업,사법시험 수석 합격,최연소 합격,대학 재학 중 합격,연수원 수석 수료 등 ‘똑똑하다’는 레테르를 한두 개씩 달고 다니는 한국을 대표하는 수재들이었다.

예컨대,서울대 법대를 수석입학하고 연수원을 3등으로 수료한 천정배는 전두환 정권에서 임용되길 거부하고 김앤장을 택했고 22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연수원을 차석으로 수료했지만 학생운동 전력으로 판사임용이 되지 못한 문재인을 조영래 변호사가 김앤장에게 소개하기도 했다는 후문이다.김영무는 초기부터 유능한 인재의 영입을 주도하였으니,연수원 출신의 우수 인재들이 로펌행이라는 큰 흐름을 이끌어내고 탄탄한 맨파워를 구축하여 훗날 김앤장의 비약적인 발전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1980년대 외국인 투자가 개방되고 국내 기업과 외국 기업의 합작투자가 줄을 이으면서 로펌업계에 특수가 생겼다.인재를 확보하고 역량을 축적해 온 김앤장은 쏟아져 들어오는 사건들을 맡으면서,전문성과 실력을 강화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렸다.김앤장을 바라보는 세상의 눈길이 고운 것만은 아니다.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특권적 이익을 누린 재벌들의 이익을 대변한 결과,김앤장이 재벌과 함께 급성장했다는 것이다.2003년 외환은행이 론스타에 헐값 매각되었다고 논란을 빚은 사건에 론스타의 변호를 맡은 것이 김앤장이다.최근에는 일제시대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이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미쓰비시 측의 변호를 맡은 것과 가습기 살균제 피해발생 소송에서 옥시 측의 법률대리를 맡기도 했다.

김영무는 2005년 570억원을 벌어 개인소득 국내 소득 1위, 2006년에도 600억 원의 소득신고를 하였는데, 이건희보다 많은 액수였다고 한다.2015년 현재 총 직원 2500명 정도다.변호사 540명과 변리사 181명을 두고 있다.지적재산권 분야에는 600여명 정도로,2013년 현재 변리사 150여명,변호사 50여명 기타인력 400여명으로 엄청난 규모를 자랑한다.김영무는 40여년 강력한 리더십과 탁월한 판단력으로 김앤장을 명실상부하게 아시아 최고의 로펌으로 만들었다.오늘날의 김앤장은 김영무 대표가 없이는 불가능한 길이었다는게 국내외의 일관된 평가다.

▲ 김영무 조모 밀양 박씨 묘소.1968년 졸(卒)
▲ 김영무 조모 밀양 박씨 묘소.1968년 졸(卒)
파주시 조리읍에 있는 김영무의 선영을 찾아갔다.김영무의 조모 밀양박씨의 묘소는 중견기업~대기업을 추동할 역량의 혈처에 자리한다.김영무의 부친 묘소는 많은 대기업 오너의 선영보다 훨씬 막강한 천하대지로 꼽을 수 있다.IMF외환위기 이후 김앤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데 결정적 추동력을 주었을 것이다.또한 1999년 별세한 모친의 묘소도 대기업의 추동이 가능한 역량이니 김앤장의 추동력에 엔진을 하나 더 장착한 셈이다.

묘역 주맥로는 가늠하기 어려운 요원(遙遠)한 곳에서 출발하여,장원한 행도를 거쳐서 위 지도의 홍점에 이르러,네 지점으로 분맥한다.네개의 혈처 중 세 개를 김문에서 골라썼으니 그 절묘함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어떤 사람이 필자에게 “좌청룡 우백호에 대한 언급이 없고,좌향 등 이법(理法)을 언급하지 않는 이유가 뭐냐”고 묻는다.기(氣)는 풍수의 시작이자 마지막이다.기의 행지(行止)를 살펴서 추길피흉하는 것이 풍수의 목적이다.기감(氣感)이 된다면 혈처의 진가와 대소를 가늠할 수 있고 수 많은 난해한 풍수 이론도 필요없다는 것이 선사들의 말씀이다.
▲ 손건웅(孫健雄) 풍수유람가    ·춘천고등학교·강원대학교 졸업    ·네이버카페 ‘동강의 풍수유람’ 운영    ·저서 ‘세상을 풍수로 보다’ 외 1권
손건웅(孫健雄) 풍수유람가
·춘천고등학교·강원대학교 졸업
 ·네이버카페 ‘동강의 풍수유람’ 운영
 ·저서 ‘세상을 풍수로 보다’ 외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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