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공우   시인   강원도사회문화연구소장
▲ 이공우
시인
강원도사회문화연구소장
어느 젊은 시인이 당대의 거장 ‘라이너 마리아 릴케’에게 자신의 시를 평가해 달라고 부탁하는 편지를 보냅니다.소박하지만 그 간절함이 어떠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이에 대해 릴케는 ‘비평을 통해서는 결코 예술작품에 가까이 갈 수 없고,무엇보다 예술작품은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서두를 전제하면서 다음과 같은 고언이 담긴 완곡한 답장을 보냅니다.“누구도 충고를 해주거나 당신을 도와줄 수는 없습니다.그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방법은 단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자기 자신 속으로 파고들어가 보십시오.그리하여 당신에게 쓰라고 명령하는 그 근거를 캐보십시오.만일 쓰는 일을 그만 둘 경우에는 차라리 죽어버릴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라이너 마리아 릴케,‘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이동민 옮김,1996). 진실한 시인에게 있어서 시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아주 간명하게 일깨웁니다.

‘시가 지향하는 자리,시인이 머물러야하는 자리는 더 이상 물러설 수도 나아갈 수도 없는 극지(極地)’이고,‘시가 있는 자리는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 삶을 연소함으로써 밝힐 수 있다’고 한 이성복 교수의 말도,릴케와 똑같은 가르침을 우리에게 줍니다(이성복,‘극지의 시’,2015).

시심(詩心).그야말로 죽음에 이르는 처절한 고통,생명의 그 깊은 시원으로부터 느낄 수 있는 영혼의 울림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요? 그러기에 ‘시를 논할 때는 시를 쓰듯 해야 한다’고도 하고,‘시를 제대로 읽어보려는 사람은 시 앞에서 겸허하고 공경스러워야 한다’는 말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김사인,‘시를 어루만지다’,2013).

어디 시뿐이겠습니까.춤과 음악이 그렇고 미술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장구한 세월 동안 사랑 받아온 모든 예술작품에는,시대와 장소의 달리함을 뛰어 넘어 재발견되고 재해석되는 예술혼의 치열함이 녹아있다는 말로 밖에는 달리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그런데,세상에는 그런 시인,그런 예술가만 있는 건 아닙니다.엉터리(?) 같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죠.그래도 그건 어디까지나 그 개인의 문제입니다.릴케의 말에 견준다면 아주 천박한 표현이긴 하지만,‘마구잡이식으로 등단’하여 ‘시의 기본 요소도 모르고 줄만 바꿔 놓으면 시가 되는 줄 아는’ 그런 시인으로 평가 받으면 그 뿐입니다(강원도민일보,2016.01.09).심지어 ‘예술가가 작품에 콘셉트만 제공하고 실행을 다른 이에게 맡기는 것은 관행’이라는 또 다른 예술세계도 있고,설령 그것이 사회문제가 되더라도 ‘이에 대한 대중의 분노나 검찰의 수사는 현대예술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과잉행동’이라고 변호해주는 전문가도 있습니다.그러다 막판에는‘화투가지고 놀다가 쫄딱 망했다’고 쿨하게 털어버리면 그만입니다.다시 말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문제이니까요.

정령 바라는 바는,국가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막중한 분들이,시심의 진정성,가파른 절벽과 마주하는 절박한 예술혼적 책임감을 가졌으면 하는 것입니다.특히 우리 정치인들에게 그렇습니다.입으로는 늘 ‘국민의 뜻’을 말하지만 행동은 한결같이 정치적 야망과 권력욕구,당리당략을 따라 갑니다.‘쓰는 일을 그만두면 차라리 죽어버릴 수도 있는지’를 자문하는 시심,그런 마음으로 ‘국민의 뜻’앞에 서기를 바란다면,이 땅의 정치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순진한 발상일까요? 그러나 진정 그럴 수만 있다면,저고리를 직접 벗어 의자에 걸거나,식당에서 식판을 들고 다니는 장면,출장 가방을 들고 전용기 트랩을 오르는 대통령의 모습들이 뉴스의 찬사가 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물론 전에 볼 수 없던 대통령의 새로움이 우리에게 신선한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은 틀림없지만,이 화급하고 냉혹한 국내외의 현실에서,혹시라도 보석상자에 취해 정작 보석을 잃는다면(買櫃還珠) 그 엄청난 손실을 어찌할 것이냐는 우려가 깊은 것 또한 사실이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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