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가문의 혈처 묘소 ‘ 3대 망한다’ 속설 비켜가
김구선생 부부묘소 효창원 대명당
모친 묘소 장관 이상 배출 할 역량

▲ 대전현충원에 소재한 곽낙원 (사진 왼쪽)여사와 장남 김인 부부(오른쪽)묘소.맥로는 묘소 전방의 우측 방에서 출발하여 우회하고 직진하여 곽여사 묘소에서 결혈하고,동일한 맥로에서 분지한 맥로가 김인 묘소에서도 혈을 맺는다.
▲ 대전현충원에 소재한 곽낙원 (사진 왼쪽)여사와 장남 김인 부부(오른쪽)묘소.맥로는 묘소 전방의 우측 방에서 출발하여 우회하고 직진하여 곽여사 묘소에서 결혈하고,동일한 맥로에서 분지한 맥로가 김인 묘소에서도 혈을 맺는다.

문재인 대통령은 얼마전 광복절을 맞이하여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는 말이 사라지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드물지만 이런 속설의 예외가 있으니,우당 이회영의 손자가 전 국정원장 이종찬과 국회의원 이종걸이고 신안 장산도의 장병상 후손은 청와대 정책실장 장하성을 포함하여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인재를 배출하고 있다.항일 독립운동의 상징이고 임정의 법통을 지켜낸 백범 김구 가문은 망한다는 속설을 비켜간 경우이다.

백범과 곽낙원 여사 그리고 김인과 김신의 묘소에서 그 풍수적 이유를 살펴본다.일제의 간악한 독수(毒手)도 피해냈던 백범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소위 안두희의 흉탄에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하고 7월 5일 효창원에 안장되었다.효창원의 역사는 조선 정조(正祖; 재위 1776~1800년)의 왕세자 문효세자가 5살에 요절하자 그를 묻은 것이 그 기원이다.이후 문효세자의 생모인 의빈(宜嬪) 성씨의 묘소와 순조(純祖)의 후궁인 숙의 박씨와 그의 딸 영온공주를 이곳에 묻었다.당시는 울창한 산림을 갖췄고 면적은 여의도 공원의 2/3에 이르렀다.1924년 일제는 이곳을 일부 개방하고 1940년에는 묘역 전체를 공원으로 지정하니,1945년 이곳의 모든 묘를 서삼릉으로 이장한다.

▲ 백범의 묘소.최준례 여사는 1994년 4월 12일 중국에서 봉환하여 합장. 묘소 뒤 승금(乘金,묘소뒤의 불룩한 부분)이 효창원의 정혈인 대명당이다. 백범의 묘소는 뒤에 있는 대명당의 여기(餘氣)로 자리가 되었다.
▲ 백범의 묘소.최준례 여사는 1994년 4월 12일 중국에서 봉환하여 합장. 묘소 뒤 승금(乘金,묘소뒤의 불룩한 부분)이 효창원의 정혈인 대명당이다. 백범의 묘소는 뒤에 있는 대명당의 여기(餘氣)로 자리가 되었다.
효창원을 애국지사의 묘역으로 만들려고 한 이가 백범이다.1946년 7월에 삼의사의 유골봉환과 1948년에 이동녕 차리석 선생의 유골을 추가로 봉환하여 이곳에 모셨다.1892년(壬辰) 당시 17세의 창암(昌岩;백범 아명)은 황해도에서 실시된 조선조 최후의 향시에 응시한다.당시 과거시험의 풍속은 글을 짓는 사람과 쓰는 사람이 달랐고 다른 사람 명의로 과거시험을 치기도 했다.시험도 보기 전에 장원을 비롯한 합격자가 이미 정해진 것이다.“내가 심혈을 다해 장래를 개척하기 위해 공부한 것인데 선비가 되는 통로인 과거장의 꼬락서니가 이 모양이니…(중략) 나도 이제 다른 길을 연구하리라 결심하였다” 백범일지에 기록된 과거장의 풍경은 그를 절망케 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했다.

백범은 과거 공부에 미련을 버리고 풍수와 관상을 공부한다.석 달을 두문불출하며 관상학을 공부하지만 좌절에 빠진다.자신의 얼굴에 좋은 점은 없고 천하고 흉한 상밖에 없는 것을 확인하였기 때문이다.그러나 ‘마의상서’의 한 구절이 선생의 운명을 결정한다.‘상이 좋음이 몸이 좋음만 못하고 몸이 좋음이 마음이 좋음만 못하다(相好不如身好, 身好不如心好).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길이었다.

▲ 대전현충원에 소재한 김신의 묘소.이 묘소도 맥로가 앞에서 진입한다.
▲ 대전현충원에 소재한 김신의 묘소.이 묘소도 맥로가 앞에서 진입한다.
곽낙원 여사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격분한 아들이 일본인을 살해한 혐의로 투옥되자, 매일 형무소로 면회를 와서 아들을 격려하였다.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었다.1920년대 초 상해 영경방 골목과 시장통의 쓰레기장에 한 노파가 밤마다 이곳을 뒤져 배추껍질 등의 채소를 걷어갔다.이를 소금에 절여 음식을 하고 시래깃국을 끓여 임정요인들의 식탁에 올렸다.임정요인들이 굶기를 밥 먹듯 하던 시절이었다.이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려고 쓰레기통을 뒤진 이가 바로 곽낙원 여사였다.임정이 남경에 있을 때였다.임정 요인들이 곽여사의 생일상을 차리기 위해 돈을 모으고 있었다.이를 눈치챈 곽여사는 엄항섭(백범 측근)에게 돈을 달라고 하였다.생일 날 요인을 초대한 뒤 식탁 위에 물건을 싼 보자기를 내놓았다.보자기에는 권총 두 자리가 들어 있었다.“독립운동하는 사람들이 무슨 생일인가? 이 총으로 왜놈 한 놈이라도 더 죽여라”고 하셨다.1939년 4월, 임종을 앞두고 백범에게 유언을 남긴다.“창수(백범의 본명)야! 네가 열심히 노력하여 빨리 나라의 독립을 실현해다오.네가 성공해 돌아가는 날,나와 에미(백범 부인)의 유골을 조국 땅에 묻어다오.” 곽여사는 80여 성상의 한 많은 일생을 이국에서 마감하였다.곽여사의 유해는 중경(重慶) 화상산(和尙山)에 모셨다가 광복 후, 손자인 김신이 조국의 땅으로 모시고 왔다.

백범의 장남 김인(金仁)은 할머니와 동생 신(信)과 함께 중국으로 탈출한다.낙양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독립군 특무대에서 근무하며 일본의 주요기관 폭파와 정보수집 활동을 하다 조국 광복을 다섯 달 앞두고 중경에서 별세했다.김인의 부인 안미생(1914~2007년)은 안중근 의사의 조카로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장남 김인은 1999년 4월 9일 대전현충원에 할머니 곽낙원 여사와 나란히 안장됐다.곽 여사 묘소의 역량은 후손 중 장관이상은 배출할 역량이고 김인 부부 묘소의 역량은 백범 묘소와 대등하다.백범의 차남인 김신(金信 ; 1922.9 ~ 2016.5)은 운남성의 서남연합대학 철학과를 수료하고 중국 공군군관학교를 졸업했다.1947년 국방경비대 항공 소령을 역임하고 1948년에는 남북협상에 참여하는 부친을 따라 평양을 다녀오기도 했다.6·25가 발발하자 직접 전투기를 몰고 19차례나 출격하였고 1952년에는 미군이 500여 차례 출격에도 성공하지 못한 평양승리호 철교 폭파작전을 완수하여 한국 공군의 명성을 떨쳤다.이후 제6대 공군참모 총장,주중(타이완)대사,교통부 장관을 역임했다.

대전현중원에 소재한 김신의 묘소 역량은 상당히 좋다.현 청와대 비서실장 임종석의 조모의 역량과 대등하다.곽낙원 여사와 김인,그리고 백범 부인은 별세 이후 상당한 기간이 지나서 이장한 한 것이므로 그간의 길흉은 판단하기 어려우나 지금의 묘소는 모두 명당에 자리하니 독립운동을 한 후손도 잘 된다는 사례가 될 것이다.

손건웅(孫健雄) 풍수유람가 ·춘천고등학교·강원대학교 졸업 ·네이버카페 ‘동강의 풍수유람’ 운영 ·저서 ‘세상을 풍수로 보다’ 외 1권
▲ 손건웅(孫健雄) 풍수유람가
·춘천고등학교·강원대학교 졸업
·네이버카페 ‘동강의 풍수유람’ 운영
·저서 ‘세상을 풍수로 보다’ 외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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