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가문의 혈처 묘소 ‘ 3대 망한다’ 속설 비켜가
김구선생 부부묘소 효창원 대명당
모친 묘소 장관 이상 배출 할 역량
백범과 곽낙원 여사 그리고 김인과 김신의 묘소에서 그 풍수적 이유를 살펴본다.일제의 간악한 독수(毒手)도 피해냈던 백범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소위 안두희의 흉탄에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하고 7월 5일 효창원에 안장되었다.효창원의 역사는 조선 정조(正祖; 재위 1776~1800년)의 왕세자 문효세자가 5살에 요절하자 그를 묻은 것이 그 기원이다.이후 문효세자의 생모인 의빈(宜嬪) 성씨의 묘소와 순조(純祖)의 후궁인 숙의 박씨와 그의 딸 영온공주를 이곳에 묻었다.당시는 울창한 산림을 갖췄고 면적은 여의도 공원의 2/3에 이르렀다.1924년 일제는 이곳을 일부 개방하고 1940년에는 묘역 전체를 공원으로 지정하니,1945년 이곳의 모든 묘를 서삼릉으로 이장한다.
백범은 과거 공부에 미련을 버리고 풍수와 관상을 공부한다.석 달을 두문불출하며 관상학을 공부하지만 좌절에 빠진다.자신의 얼굴에 좋은 점은 없고 천하고 흉한 상밖에 없는 것을 확인하였기 때문이다.그러나 ‘마의상서’의 한 구절이 선생의 운명을 결정한다.‘상이 좋음이 몸이 좋음만 못하고 몸이 좋음이 마음이 좋음만 못하다(相好不如身好, 身好不如心好).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길이었다.
백범의 장남 김인(金仁)은 할머니와 동생 신(信)과 함께 중국으로 탈출한다.낙양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독립군 특무대에서 근무하며 일본의 주요기관 폭파와 정보수집 활동을 하다 조국 광복을 다섯 달 앞두고 중경에서 별세했다.김인의 부인 안미생(1914~2007년)은 안중근 의사의 조카로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장남 김인은 1999년 4월 9일 대전현충원에 할머니 곽낙원 여사와 나란히 안장됐다.곽 여사 묘소의 역량은 후손 중 장관이상은 배출할 역량이고 김인 부부 묘소의 역량은 백범 묘소와 대등하다.백범의 차남인 김신(金信 ; 1922.9 ~ 2016.5)은 운남성의 서남연합대학 철학과를 수료하고 중국 공군군관학교를 졸업했다.1947년 국방경비대 항공 소령을 역임하고 1948년에는 남북협상에 참여하는 부친을 따라 평양을 다녀오기도 했다.6·25가 발발하자 직접 전투기를 몰고 19차례나 출격하였고 1952년에는 미군이 500여 차례 출격에도 성공하지 못한 평양승리호 철교 폭파작전을 완수하여 한국 공군의 명성을 떨쳤다.이후 제6대 공군참모 총장,주중(타이완)대사,교통부 장관을 역임했다.
대전현중원에 소재한 김신의 묘소 역량은 상당히 좋다.현 청와대 비서실장 임종석의 조모의 역량과 대등하다.곽낙원 여사와 김인,그리고 백범 부인은 별세 이후 상당한 기간이 지나서 이장한 한 것이므로 그간의 길흉은 판단하기 어려우나 지금의 묘소는 모두 명당에 자리하니 독립운동을 한 후손도 잘 된다는 사례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