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헌   시인· 전 속초양양교육장
▲ 김종헌
시인· 전 속초양양교육장
여름방학을 맞아 지인들과 10일간 유럽여행을 다녀왔다. 새로운 풍경과 문화를 보는 일은 늘 즐겁다. 그러나 나는 이번에는 또 다른 관점에서 새로운 풍경과 문화를 들여다보는 여행을 즐기기로 하고 길을 떠났다. 이미 한 번 가 보았던 영국의 대영박물관과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에서는 전 세계에서 수집된 다양한 유물과 예술작품을 감상하며 감탄하기보다는 그 유물과 예술작품들이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를 더 유심히 살펴보았다. 대영박물관에 전시된 그 많은 문화유산들이 왜 자신들의 조상들이 만든 제자리에 있지 못하고 다른 나라 박물관의 전시장에서 관광객들의 눈요기가 되고, 심지어는 수장고에서 햇빛을 보지 못하고 쌓여 있는지를 생각했고, 왜 프랑스의 콩코드 광장에 이집트의 오벨리스크가 전시되어 있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역사는 힘 있는 자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단순한 논리를 내세우면 간단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일이지만, 인간을 넘어 자연의 섭리로 다시 들여다보면 그것이 얼마나 빈약한 논리인지를 쉽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 생각은 스위스 융프라우의 스핑크스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만년설의 흔적을 보면서 더욱 강해졌다.

오래 전에는 인간의 발길조차 닿기 쉽지 않았던 만년설이 이제는 군데군데 녹아내려 곳곳에 맨살을 드러낸 산비탈을 보며 나는 인간의 오만함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걸어서는 올 생각조차 못하던 산봉우리를 기계 문명의 힘을 빌려 올라와서 감탄사를 내 뱉는 그 많은 사람들의 중의 하나인 나나, 트래킹이라는 이름으로 저 밑에서 만년설을 밟고 열심히 올라오고 있는 개미처럼 작게 보이는 그들이나, 모두가 자연의 질서를 깨뜨리고 있는 주범이 아닐까라는 생각에 나는 감탄사를 쉽게 뱉어낼 수가 없었다.

이런 생각은 이탈리아의 오래된 유적들을 보면서 더욱 강해졌다. 물위에 지어진 도시 베네치아를 멀리서 보는 풍경은 매우 아름다웠다.

그러나 곤돌라를 타고 수로를 따라 마을을 돌아보는 시간에 우리 일행은 현지 가이드가 불러주는 이탈이아 가곡에 박수를 보냈지만, 나는 물에 잠겨가는 집들의 계단을 내려다보며 태평양의 섬 투발루를 생각했다. 저 계단들은 인간의 시계로는 몇 백 년 전 사람들의 발길이 수없이 밟았던 길이었지만 지금은 단지 관광객들의 눈요기에 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다른 시각으로 보았을 때, 그것은 엄중한 자연의 경고이다.

태평양의 섬나라인 투발루는 9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인데,지구의 기후변화로 빙하들이 녹아내린 해수면의 변화로 이미 2개의 섬이 사라지고,조만간 나라 전체가 바다 속으로 가라앉을 것이라고 한다. 나는 베네치아의 그 물에 잠긴 계단들에서 또 다른 투발루를 보고 있었다.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남겨진 사라진 도시 폼페이의 유적을 보면서 나는 또 다른 자연의 힘과 인간의 유한하면서 미약한 힘을 생각했다.

일상생활을 하다 화산폭발이라는 자연의 순환현상 앞에서 그대로 멈추어진 2000여 년 전의 타임머신을 보면서 우리 인간의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새끼 돼지를 잡아 양념한 후 오븐에 넣으려던 여인도, 밀가루 반죽을 밀어 빵을 빚던 제빵사도, 해변에 누워 더위를 식히던 귀족도 모두가 잠시 후에 다가올 자신의 운명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번 여행을 통해 나는 인간이 자연 앞에서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를 실감하는 한편, 아직도 우리 인간이 얼마나 그 위대한 자연 앞에서 오만한 지를 같이 보았다.

재앙은 갑자기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지금 자연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경고를 보내고 있다. 개구리 요리를 할 때 끓는 물에 갑자기 넣으면 살기위해 몸부림을 치지만, 차가운 물이 담긴 솥에 넣고 불을 때면 높아지는 물 온도에 적응해 가며 서서히 죽어간다고 한다. 지금 우리 인간의 행태들이 그런 개구리를 모습을 꼭 닮아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지구의 역사 45억년에서 인간의 역사는 불과 400만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한다.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자연의 경고를 무시하면 폼페이와 투발루의 비극이 우리 인간의 오만함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더 빨리 알려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연의 섭리와 힘은 우리 인간이 가진 그 어떤 힘보다도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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