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식 논설위원

 '장미의 이름으로'라는 소설을 쓴 작가이자 인문·사회과학에 대한 폭넓은 지식으로 기호학을 대중화시킨 학자 움베르토 에코에게 한 한국인이 질문했다. "한국의 개고기 문화를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행위로 몰아붙이는 여배우 브리지드 바르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에코가 대답했다. "모든 인간은 보고, 냄새 맡고, 말하고, 먹고, 배설하고, 성행위를 하며, 수직으로 서서 걷고, 쉬고 싶을 때는 수평으로 눕고 싶어합니다. 어떤 사람이 개고기를 나쁘다 한다면 그 사람은 인간의 이런 보편 가치 중 하나인 먹고 배설하기를 침해한 것이죠. 나는 한국인이 개고기를 먹는다는 사실을 보편 가치를 침해한 것으로 볼 수 없으므로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만, 바르도처럼 단 한 번도 문화인류학 공부를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무지몽매한 행위를 반복하게 될 겁니다." 사실 나는 일찍이 이 때처럼 시원한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다.
 이 움베르토 에코에게 또 질문했다. "문화의 차이는 때로 극단적인 경우 그 종말이 폭발로 끝나기도 합니다. 9·11 테러 사태는 아마도 문화적 차이의 가장 비극적인 양상이 아닐까요?" 에코가 또 대답했다. "지금은 일종의 문명간 교배 시대죠. 상이한 문명들 사이의 상호 교류로 인류가 진일보하기 위한 교배의 이 시대에 반드시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 겁니다. 9·11이 바로 그 고통과 대가 중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꼭 1 년 전의 이 대화에서 나는 21 세기를 전망하는 매우 흡족하고 유익한 결론을 얻어냈었다.
 그러나 1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이라크전을 보면서 그 고통 또는 값비싼 대가가 9·11 하나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중이다. 이라크전을 거의 체감의 수준까지 경험하면서 우리는 동시에 브리지드 바르도의 보신탕에 대한 무지몽매한 편견이 얼마나 파시스트적인지를 다시 음미해 보게도 된다. 영미(英美)가 아랍 문화에 대해 바르도적 무지가 아니라 토렐랑스 즉, 관용을 가질 만큼 이해했더라면 이런 무식하고, 더럽고, 파시스트적이고도, 잔인한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미국이 '충격과 공포' 전략을 썼음에도 이라크가 장기간 견고하게 바그다드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은 누군가가 결코 즐거워할 일이 아니라 할지 몰라도 적어도 나에겐 그리 낭패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나아가 나는 그리하여 바야흐로 제1차 세계대전을 치른 뒤 볼셰비즘이 공산 전제주의로 변모하도록 만들고, 이어서 이탈리아의 파시즘을 낳고, 그리고 15 년의 위기와 격동 끝에 나치즘을 낳고, 또 그것이 제2차 세계대전을 낳고, 이어 냉전을 낳은 20 세기의 여러 전쟁들보다 21 세기 첫 전쟁인 이라크전이 서산으로 저무는 영미 헤게모니의 장엄한 그림자를 보게 해 주었다는 면에서 더 역사적이라 느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이라크전은 무엇인가? 앞으로 영미가 이기든 지든 이라크전은 이로써 영미의 역사 문화적 권위가 드디어 와르르 무너지는 찬란하고도 화려한 전주곡이란 말이다. 예컨대 이렇다. 세계 문학이 영미 중심이 아니라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마술적 사실주의 개척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이들의 후배 알베르토 푸겟, 레오나르도 파두라로 대표되는 제3 세계 포스트 붐 작가들이 주도하고 있듯이 말이다. 대중 음악은 반세기 이상 헤게모니를 장악해 온 영미 팝 음악계를 걷어치우고 자메이카의 레게, 브라질의 트로피칼리아, 쿠바나 푸에르토리코의 살사, 나이지리아의 아프로비트 등이 이끌고, 영화 역시 할리우드를 밀어내고 이란 중국 한국 영화가 새로운 영화 미학을 창조해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떠들썩한 흥분 속에 시작된 21 세기는 어디엔가로 사라지고 '충격과 공포'가 보고, 냄새 맡고, 말하고, 먹고, 배설하고, 성행위를 하며, 수직으로 서서 걷고, 쉬고 싶을 때는 수평으로 눕고 싶어하는 모든 인간의 보편 가치를 찢어 발기고 있으므로 영미의 헤게모니는 이로써 땡이라는 것이다, 완전히 끝이라는 것이다. 인간을 거역하고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매일 밤 영상으로 이라크전을 보며 나는 마침내 이렇게 단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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