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게 보이고 싶어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본능일 것이다.이 때문에 누구나 아름다움에 다가서려 노력한다.그러나 미(美)의 기준은 고정 불변한 것이 아니다.사람에 따라 보는 눈이 다르고 시대에 따라 아름다움의 조건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보게 된다.그러나 아름답다고 느끼는 결과로서 일어나는 마음의 동요는 다르지 않다.다른 대상을 보고 같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다른 매력을 느낀다는 것이다.

중국 송나라의 태재(大宰) 화보독(華父督)이 길을 가다가 사마(司馬) 공보가(孔父嘉)의 처에 반한다.그 미모에 취해 “똑바로 쳐다보고 지나치고 난 뒤 되돌아보기까지 하면서 ‘아름답고 곱다’고 말했다”라는 기록이 전한다.결국 그 미혹에서 헤어나지 못해 남의 여인을 빼앗아 비난을 불러들이게 된다.고금을 막론 고개를 돌려세우는 게 미인의 힘인가 보다.꼭 외모나 이성간의 끌림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일전에 춘천시 서면에 문을 연 붓 박물관에 들렀다가 붓글씨 체험을 했다.격자의 글 판에 물을 먹물삼아 써 보는 것인데 어쩌면 중국의 유명 관광지에서 한 번씩 해 봤음직하다.한국에서 대학원을 갓 마친 중국유학생이 동행했는데 멋들어지게 시 한 수를 써 내려 간다.“曾經滄海難爲水(증경창해난위수) 除却巫山不是雲(제각무산불시운)”! 당나라 시인 원진(元鎭·779~831)의 ‘이사(離思)’라는 칠언절구였다.

“일찍이 바다를 보고나니 강물은 물 같지 않고,무산의 구름을 보고나니 뭇 구름은 구름이 아니더라”는 뜻이다.집에 돌아온 뒤에 그 아귀를 맞춰 보았는데 “取次花叢懶回顧(취차화총라회고) 半緣修道半緣君(반연수도반연군)”이라는 구절이 그 뒤를 이었다.“아름다운 미인이 줄줄이 지나가도 돌아보지 않는 것은,반은 도를 닦은 때문이고 나머지 반은 내 마음 속에 그대가 있기 때문이 라네”라는 내용이다.

소학 때부터 붓을 잡고 시를 외게 하는 중국 식 교육의 위력이 아닌가 싶었다.붓을 다루고 문장을 써내려가는 솜씨가 그만큼 거침이 없었다.시를 외고 붓을 잡는 것에 점수를 쳐 주지 않는 곳에선 어림없는 얘기다.그가 마저 쓰지 못한 문장엔 백거이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시인의 사랑이 있었다.일찍 여읜 아내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은 그 어떤 화려한 꽃도 흔들지 못하는 마음속의 미인이었던 것이다.

김상수 논설실장 ssookim@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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