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출한 재주믿고 사람들 눈물과 땀 외면하는것 부끄러운일
당연병처럼 번지고 있는 흙수저 파먹는 금수저 갑질
존엄은 부끄러움 알고 고쳐나갈때 시작된다
살기위해 다른생명 먹어야하는 이율배반, 모든 것에 걸쳐있다

‘열적 고기압’이라는 말을 만들만큼 덥던 여름도 지나가 버렸다.찬란하였던 매미소리가 시나브로 풀벌레 울음소리로 뒤덮인다.가을은 이렇게 무릎 아래로 온다.그렇게 포악을 떨던 더위도 옛것이 되어 당장 오늘 먹을 밥상의 반찬만도 못한 관심사가 되고 만다.그래서 산 사람들은 사는가 싶고,죽은 이들은 그럭저럭 잊혀져 편안해지는 모양이다.어쨌거나 한 시절이 가고 또 그만큼의 사연이 생길 것이다.우리네 사는 일도 이와 같아서 하루하루 생기는 일들에 어찌 일일이 고깝고 민감하게 대응할 수 있을까만,그래서 일희일비 말라는 말이 생겼을 법하다.그렇지만,요사이 백번 양보해도 이해 못할 일들이 이어지고 있다.

관사병,운전기사,아파트 경비원,택배 노동자,체인점 점주,외국인 노동자,장애인 등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후안무치의 기사들이 줄을 잇는다.흙수저 파먹는 금수저의 갑질이 당연병처럼 번지고 있다.이럴 때마다 나오던 것이 급속한 산업화의 부작용이었는데,산업화는 벌써 애저녁에 이뤄진 거 같은데 이 폐단은 좀비처럼 만성화될 추세이다.여기에 자본을 낀 갑질에 젖는 것인지,맞으면서 닮는 것인지 조물주보다도 급이 높다는 건물주를 부러워하고 각종 법인의 온갖 탈세와 편법이 유능함으로 통하고,돈 되는 것이라면 동네 골목 빵조각까지 먹어 치우는 대기업 상술에 끄덕이는 우리는 어느 새 자본의 음침한 골짜기 옆을 지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존엄하다고 했을 때의 존엄은 무엇이 전제되어야 할까.존엄은 부끄러움을 알고 이를 고쳐나갈 때 시작된다.한마디로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아는 순간’부터 인문은 시작되는 것이다.약자의 고통이나 눈물로 쌓은 문명은 그 자체로 치욕인 것인데 이 고혈을 디디고 섰는 이들의 뱃살이 고봉이라면 그 사회는 이미 병들었거나 죽은 것이다.이런 사회는 통상 완고하고 딱딱하고 권위적이기 마련이다.다시 말해 뻔뻔해지는 것인데 이 뻔뻔함에 대해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는 “우리가 우리시대의 바깥에 있지 않는 것, 우리시대와 부끄러운 제휴를 지속하는 것”이라 표현했다.다소 수사적이긴 하지만,뻔뻔함은 성찰도 반성도 없이 체제에 익숙해지는 상태라는 것이다.

이 뻔뻔함을 경계하는 말은 맹자의 수오지심(羞惡之心)이나 관중의 예의염치 등 많이 있지만 여기서는 남명(南冥)의 상소를 조금 살펴보자.남명 조식은 1556년 명종 임금에게 그 유명한 ‘단성소’를 올리는 데 조금 발췌해보면 “(전략) 나라의 근본은 없어졌고 하늘의 뜻도 민심도 떠나버렸다.고목나무가 100년 동안 벌레에 속이 패어 진이 다 말라버려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낮은 벼슬아치는 아랫자리에서 술과 여색에 빠져 있고 높은 벼슬아치는 윗자리에서 빈둥거리며 뇌물을 받아 재물 불리기에 여념이 없다.오장육부가 썩어 온 나라의 형세가 안으로 곪을 대로 곪았는데도 누구 한 사람 책임지지 않는다. 내직의 벼슬아치들은 자기들의 당파를 심어 권세를 독차지하고,외직에 있는 벼슬아치들은 백성 벗겨 먹기를 마치 여우가 들판에서 날뛰는 것 같다.”어째 익숙한 풍경이 아닌가.

그러니 이런 뻔뻔이거나 부패는 새삼스러울 게 아니라는 것인데,2015년 인사혁신처에서 전국 성인남녀 1000명과 공무원 4058명을 대상으로 벌인 공직가치에 대한 인식 조사 결과도 재미있다. 여기서는 공직사회에서 필요한 공직가치로 청렴성과 사명감,책임감을 한목소리로 꼽았다.공직사회에 요구되는 덕목이 공정함이나 유능함이 아니고 청렴이 될 만큼의 부패제일지경에 이른 것이다.어쩌다 이 지점에 이른 것일까.사실은 나도 잘 모르겠다.진심으로 헷갈리는 일이지만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는 것이 일신 혈족의 영달을 찾는 데에 머무르거나 몇 년이 흐르도록 수장된 자궁민의 정확한 사연도 알지 못하는 나라에서 어쩌면 당연한 게 아닌가.

길거리에 꽁초나 쓰레기를 버리면서 그 행위에 대해 뭐라 하면,우스개삼아 이래야 이것을 치우는 사람들도 먹고 산다고 한다.그렇지만 막상 그 일을 하는 사람에 대한 존중은 없고,자신이 버리는 행위에 근거만 주고 만다.사람의 격이 그가 받는 임금이나 지위로 결정되는 일은 온당한 것인가.요는 청소직이든 사무직이든 비슷한 존중을 받으며 지나친 경쟁이 완화된 사회로 가자는 것이다.대안?이미 동유럽 일부국가들은 방향을 잡아 가지 않는가.직업별 임금격차를 줄이거나 세금의 정밀한 부과 등 길이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단지 어떤 시험에 합격했다는 이유로 평생 안정될 만큼 사는 일이 단순하지는 않을 것이다.운(運)이거나 비상한 두뇌는 자기가 잘나서 그리된 것일까.자신이 원해서 특정 나라,어떤 부모,지금의 신체와 지능을 갖게 된 것은 아니지 않는가.잇몸이 없다면,이(齒)라고 어찌 혼자 버틸 수 있을까.

점점 자명해지는 사실이지만,돈이 돈을 버는 금융 상품이나 부동산으로 사람의 노력과 땀은 얼마나 모욕을 받고 있는가.그러나 그 부동산을 사용하고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없다면 텅 빈 건물과 땅,종이때기가 무슨 소용일까.자신이 특출로 아는 재주도 사실은 이런 평범한 사람들의 눈물과 땀이 없다면 어찌 성립할까.그것을 모르고 사는 일이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겠다.기실 부끄러움은 이렇게 살기 위해서 다른 생명을 먹어야 하는 운명에 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다른 생명을 먹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율배반,이런 이유로 우리의 삶이 모든 것에 걸쳐져 있다고 할 것이다.이런 점에서 보다 좋은 사회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사는 일이 의미로워진다.

섬 같은 나라에 갇혀 냉전과 피해의식에 범벅된 나라,노동이 천대받는 나라,궁민의 의료비 부담과 노후 설계를 보험이 맡는 나라,직업이 먹고 사는 수단으로 전락한 나라,명예와 자부심이 사라진 나라에서 궁민이 행복하기는 어렵지 않겠는가.개나 새도 제 식구는 건사하질 않던가.갖고 있는 재주가 조금이라도 있다면,이른바 ‘개돼지’를 면하고 살 일을 궁리하고 궁구하고 분노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나저나 한편으로 일케 주제 넘는 주제로 맥락도 없이 지절거리는 일이야말로 명백한 부끄러움이니 뻔뻔하게 살아낼 일만 남은 셈이다.

▲ 최삼경
강원도청 대변인실 근무. 북한강생명포럼 이사
저서로 한국 소설 49편의 강원도 배경지를 여행하며 쓴 산문집 ‘헤이~ 강원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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