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게 예술의 주제이며 다루어야 할 내용이다”
미술의 본질에 대한 고찰
‘추함을 곁에 둔 아름다움’
극단적 순혈·민족주의 오류
차별과 대결보다 공존 모색
하우저 '사회적 입장의 예술'
오늘날 작가들 사회 살펴야

▲ 고대 그리스 조각상 ‘라오콘 군상’.트로이 신관 라오콘과 두 아들이 포세이돈의 저주를 받는 장면을 묘사했다.
▲ 고대 그리스 조각상 ‘라오콘 군상’.트로이 신관 라오콘과 두 아들이 포세이돈의 저주를 받는 장면을 묘사했다.
도심 불빛에 아랑곳 않고 서산으로 넘어가는 볼록하고 밝은 반달.옛 고구려 땅에 닿을 내일 모레는 저 달도 딱 둥근달이 될 터다.주몽이 옮겨와 고구려 도읍지를 삼았던 졸본성이 있는 바위산,그 앞에 떠 있을 보름달을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그 장면은 예술 감각을 깨우기에 충분하리라.그와 같은 기대를 가지고 우리 역사를 가슴에 담고자 하는 작가들이 있다.

미술가들이 역사를 주제로 한다면 뭐라고 할까.영화 ‘군함도’ 논쟁에서 보듯 역사를 제대로 다룰 능력이 있을까를 염려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미술은 그러니까 ‘미술’만 다루는 게 적성대로 잘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모름지기 자신의 본분에 충실하라는 생각이다.20세기 모더니즘 미술이 그토록 강조했던 미술의 순수성을 원칙으로 여기라는 것.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이런 모던한 사고는 아주 옛 것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런 생각을 만나게 된다.

미술의 본질이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그런 잘못된 맥락과 비슷하다.왜 그럴까.원래부터 미술이 아름다움을 위해 존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아름다움과 관계되는 말 ‘미술(美術)’이 서구로부터 우리에게 전해진 것도 이제 겨우 100년 남짓이 되었을 뿐이다.그 말을 모르고 살았던 수천 년 동안 우리는 아름다움만을 위해 미술을 하지 않았다.미술이라는 말이 처음 만들어진 것도 고작 18세기 중엽이다.그러니까 그 오랫동안 미술을 해온 많은 화가,조각가,공예가,건축가들에게 아름다움은 유일한 목표가 아니었다.

▲ 중국 만주에 위치한 ‘졸본성(오녀산성)’.고구려 초기 수도로 알려졌다.
▲ 중국 만주에 위치한 ‘졸본성(오녀산성)’.고구려 초기 수도로 알려졌다.
추함을 곁에 두지 않고 순수한 아름다움만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어두움 없는 밝음을 그릴 수 있을까.비극과 아픔을 묘사할 수 없다면 행복을 어떻게 그렇게 극적으로 묘사할 수 있을까.아름다운 별빛은 검은 어둠 속에서만 볼 수 있다.작품 ‘라오콘’ 처럼 고귀한 아름다움은 무시무시한 뱀의 독이 생생할 때에야 더 위대해 보인다.그 수많은 감정과 희로애락을 빼버린 채 아름다움만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믿음이 오히려 타락일 것이다.수천 년을 두고 원래 예술(art)의 대명사였던 ‘미술’이 그 모든 감정을 쓰지 않고 예술일 수 있는 방법은 없다.그러니까 미술의 주제는 무궁무진해야 한다.세상의 모든 것이 예술의 주제며 다루어야 할 내용이다.영화 ‘군함도’가 성에 차지 않았을지 몰라도 영화 전개가 주는 배신과 반전의 긴박감은 정말 필요해 보였다.제국주의와 전쟁이 짓밟은 처절한 삶을 개인적으로는 공감하기에 부족하지 않았다.‘군함도’가 꼭 그랬다는 것은 아니지만,단지 애국주의와 민족만을 너무 강조하는 것이 아니었냐는 일부의 ‘걱정’은 있었다.그 걱정 ‘자체’를 수긍할 수는 있다.촛불에 맞서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애국을 강조하던 일도 없지 않았으니까.순혈주의와 극단의 민족주의가 자타(自他)를 나누고 단일민족을 강조한 역사적 오류도 우리는 겪어왔다.

모든 우월주의는 2차 세계대전 학살의 홀로코스트나 나치 깃발까지 든 백인우월주의 같은 괴물을 불러낼 위험이 있다.소수자에 차별 없는 세상과 다민족에 열려있는 사회를 만들려는 노력은 필요하다.차별과 대결보다는 함께 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그런 고민 속에서 미술의 주제는 더욱 다양하게 성숙될 수 있다.

역사를 보려는 이 미술가들은 우리의 삶과 예술이 사회와 맺고 있는 관계에도 주목한다.‘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썼던 하우저(Arnold Hauser ·사진)는 예술을 사회적 입장에서 서술하려 했다.예술가는 어떤 지위에서 취급받고 평가되어 왔는지,정말 예술의 역할을 했던 작품들은 궁정의 예술이었는지 민중의 예술이었는지,또 한 때 엄청난 부와 명성을 얻었던 렘브란트는 최초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왜 나락으로 떨어져 갔는지를 풀어내는 일 같은 것이었다.

사회와 현장에 충실한 리얼리즘은 하우저가 말하려는 예술의 기본 철학쯤이 될 것이다.그런 하우저가 ‘예술사의 철학’ 첫머리에서 철저하게 분석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예술사회학의 한계였다.자기에 대한 비판과 함께 분석해 가는 예술의 사회사(史)이기에 그에게서 수많은 보석 같은 가치들을 살피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그러기에 오늘의 작가는 또한 당연히 사회를 살펴야 한다.역사와 사회 앞의 미술가.그들의 태도는 우리민족의 우수함과 우월함을 확인하자는 것이 아니다.고대국가의 형성보다도 훨씬 이전인 고조선을 한 때 엄청난 세력으로 동북아를 호령했던 제국으로 여기며 자부심을 느껴보자는 것도 아니다.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아 오늘의 미술로서 풀어내보자는 것이다.다가오는 겨울 올림픽을 우리는 문화제전으로 치르려 한다.그 때 강원미술은 어떤 것을 내보일 수 있을까.우리 역사는 그때 표피만이 아닌 우리를 마침내 드러내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이 미술가들이 우리 역사를 담으려는 것은 그 맥락과도 무관치 않다.

20130811010196.jpg

◀최형순 미술평론가

정선에서 태어나 정선고·강원대를 졸업했다.서울대 미술학과 석사,홍익대 미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전북도립미술관 학예실장 등을 역임했다.1998년 구상전 평론공모 평론상을 수상하고 미술평론가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

저작권자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