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용선   아리랑박물관장
▲ 진용선
아리랑박물관장
외교부에서 발행한 ‘외교백서’를 보면 이런저런 이유로 고국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살아가는 동포의 숫자가 2016년말 기준으로 700만 명이 훨씬 넘는다. 남북한 전체를 기준으로 하면 인구대비 10%에 이르는 사람들이 해외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자의든 타의든 고향 땅을 떠나 낯선 땅에 정착해 억척스럽게 살아온 한인의 후손들이다. 이들에게 아리랑은 각별한 노래다. 아리랑은 고향생각이 날 때면 부르며 위로를 받은 노래이다. 해외 곳곳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은 아리랑을 부르며 고달픈 삶을 녹여낸다.

그러나 아리랑이 유행할 무렵은 우리 민족에게 커다란 고통과 수난의 시기였다. 수해와 풍재, 관료들의 부패, 삼정(三政)의 문란과 대규모의 민란이 이어진 구한말부터 일제의 침탈과 탄압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해외로 내몰았다. 그 때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한인들이 지리적으로 이웃한 중국과 러시아, 일본, 심지어는 하와이, 멕시코와 쿠바까지 이주해 살아야 했다.

「중용(中庸)」에 ‘행원필자이(行遠必自邇)’라는 말이 나온다. 멀리 가려면 반드시 가까운 곳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다. 1992년부터 나는 정선 아우라지에서부터 서울 마포나루와 광나루 일대까지 정선 뗏목이 흘러갔던 남한강 물길 주변의 마을을 찾아다녔다. 그 때 아리랑을 찾아가는 길을 멀리, 넓게 보려고 했다. 마침 우리 근·현대사가 빚어놓은 우울한 현장도 알게 되었다. 일제의 수탈을 피해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 중국과 러시아 땅에 정착한 한인들, 일본과 사할린의 한인들,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한 한인들이 갔던 길을 부지런히 찾아다녔다. 그 길에서 때론 슬픈 듯 애잔한 아리랑, 꺼지지 않는 불씨처럼 살아있는 아리랑을 만날 수 있었다. 아리랑을 찾아 걸을 때 그 길은 다름 아닌 ‘아리랑 길’, ‘아리랑 로드’였다.

모든 문화는 길을 통해 전파되었다. 세상의 수많은 길 가운데 비단길(Silk Road)은 동서를 잇는 인류 역사상 가장 대표적인 길이다. 당나라의 장안에서 시작해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를 지나 이란을 경유하여 지중해에 이르고, 동로마 제국으로도 길게 이어지는 이 길은 단순히 무역을 넘어 새로운 교류와 융합의 장이었다. 이 길을 통해 중국의 진귀한 비단이 주요 물품으로 거래되는 사실을 안 독일의 지리학자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은 중국에서 중앙아시아, 인도로 이어지는 교역로를 ‘자이덴 슈트라쎄(Seiden Straße)’, 즉 ‘실크 로드’,‘비단길’로 명명했다. 인류는 오랜 세월이 지나서도 실크로드를 문명의 진보를 이끌어 온 길로 기억하고 있으며, 문명교류의 통로에 대한 상징을 담은 명칭으로 오늘날도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동서를 잇는 실크로드를 떠올리며 나는 ‘아리랑 길’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1860년대 초 생존을 위해 국경을 넘고 바다를 건너 우리 민족이 떠난 길을 1994년부터 아예 ‘아리랑 로드’라고 했다. 세계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아리랑 로드는 아시아를 넘어 중앙아시아, 유럽과 태평양, 미주와 남미에 이르기까지 광활하게 이어져 있다. 그 길을 밟고,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에게는 실크로드보다 훨씬 더 길고 방대한 ‘아리랑 로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길에서 슬픈 아리랑, 기쁜 아리랑을 고루 만날 수 있었다. 그 길에서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만약 정조(正祖) 시대 문예부흥기가 이어져 근대화를 앞당겼다면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치욕도 겪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200만에 이르는 핏줄이 국경을 넘어 조선족으로, 고려인이라는 이름으로 살 필요도 없었을 것이라고. 역사에 가정은 부질없다 하겠지만 아리랑로드는 결과적으로 우리가 보듬고 동행해야 할 길과도 같다. 그 길이 서글픈 아리랑이 아니라 희망의 아리랑이 곳곳에서 울려 퍼지고, ‘우리’만의 아리랑을 넘어 ‘세계인’이 즐기는 노래의 교역로가 되게 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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