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허벌판 지나 고단한 삶 머문곳마다 아리랑의 혼 깃들다
1864년 연해주 총독 한인이주 허가
1937년 한인 자치권 요구 견제이유
한달여간 17만1781명 강제 이주
고려인 아리랑 디아스포라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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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아리랑길에 섰다.지난 2013년 7월부터 3개월여간 ‘한민족의 아리랑,정선아라리를 찾아서’를 연재한지 4년여만이다.당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아리랑의 기원과 가치를 조명하기 위해 한강의 최상류 정선 아우라지의 뗏목과 떼꾼을 찾아나섰고 삶의 애환이 담긴 ‘아리랑고개’를 넘었다.정선과 함께 3대아리랑의 고장인 밀양과 진도를 찾아 아리랑의 현주소를 살펴보고 문경새재의 고개아리랑도 새롭게 조명했다.중국 길림성과 흑룡강성 일대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전해지는 ‘이주 1.5세대의 연변아리랑’도 한민족아리랑 기획시리즈에 생생하게 담았다.

그리고 2017년 9월.우리나라 근대사와 독립운동사에 빼놓을 수 없는 ‘고려인 강제이주 80년’을 맞아 ‘한민족의 아리랑,시즌2’를 기획했다.러시아 이주한인,

고려인들의 애환을 담은 ‘강제이주 80년,아리랑로드를 가다’는 고려인의 이주역사와 함께 세계인의 노래로 뻗어나간 아리랑을 추적한다.로마제국 당시 ‘실

크로드’가 동·서양의 문물을 전해주는 교역로였다면,생존을 위해 국경을 넘나들고 바다를 건너야 했던 고려인의 투혼이 새겨진 길이 바로 ‘아리랑로드(Arirang Road)’이다.아리랑의 시원이라고 할 수 있는 정선아라리가 뗏목을 타고 고개를 넘어 한양으로 전해지고 중국 조선족과 러시아 연해주,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까지 흘러들어간 숨가쁜 사연이 아리랑길에 담겨 있다.

자,이제 그 길을 찾아 나선다.

▲ 1937년 9월 러시아 한인이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될 당시 출발역이었던 블라디보스톡 인근 라즈돌로예역.현재는 간이역으로 이용객이 드물다.  블라디보스톡/박창현
▲ 1937년 9월 러시아 한인이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될 당시 출발역이었던 블라디보스톡 인근 라즈돌로예역.현재는 간이역으로 이용객이 드물다. 블라디보스톡/박창현
고려인, 그들은 누구인가

아리랑이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된 2012년 12월.당시 유네스코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고 여러세대를 내려오며 공동체의 어울림과 단결과 일치를 가져다는 주는 대표적인 민요가 아리랑’이라고 설명했다.특정인이나 특정계층,특정세대에 불려진 노래가 아닌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민중의 노래’라는 의미다.역사적으로 세계 어느 곳을 가든,어떤 시련 속에서도 우리 민족은 아리랑을 부르며 위안을 받고 눈시울을 붉혔다.특히 고향을 떠나 광활한 벌판에서 삶을 개척한 고려인 1~2세대들이 간직하고 있는 아리랑은 토속민요를 넘어 애국가,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려인’의 사전적 정의는 ‘러시아를 비롯한 옛 소련국가에 거주하면서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한민족 동포’이다.그들의 러시아 이주 역사는 문헌기록상 18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1863년 9월 21일 당시 노브고로드스키 국경수비대장은 함경도 농민 13가구가 두만강을 건너 노브고로드만 연안의 포시에트 지역에 정착,밀을 경작하고 있다고 당시 연해주 행정책임자에게 보고한다.이것이 한인이 연해주에 정착한 첫 공식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다.이듬해 연해주 총독이 한인들의 이주를 공식 허가하면서 한인의 러시아 이주역사는 1864년을 기산점으로 기념식을 갖고 있다.당시 한인들은 집권층의 전횡과 수해,굶주림에 시달리다 결국 생존을 위해 선택한 땅이 지리적으로 인접한 러시아 연해주였다.비록 본토를 떠나 타국에 정착했지만 드넓은 농지를 개척하며 수확의 기쁨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 만으로도 그들에게는 일종의 ‘파라다이스(paradise)’로 여겨졌다.

당시 러시아 연해주 일대는 해마다 한인이주가 크게 늘어나 한인마을도 곳곳에 생겨났다.1937년 소련이 실시했던 인구조사 자료에 따르면 당시 이곳에 거주하는 한인은 16만8259명이었다.일제 강점기 강제동원된 사할린 한인 5만여명을 합하면 연해주는 20여만명이 넘는 한인이 거주했다는 것이다.특히 연해주 일대는 1910년대 이후 독립운동역사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러시아 한인들의 질곡의 삶은 1937년 8월 스탈린이 표면상 일본 첩자의 러시아 극동지방으로의 침투를 막는다는 구실로 강제이주 정책을 결정하면서 새롭게 전개된다.실질적인 강제이주 배경에는 연해주 일대에서 터전을 잡아가고 있는 한인들의 자치권 요구 움직임을 견제하고 미개발지역인 중앙아시아를 개척하려는 의도가 숨겨있었다.결국 러시아 한인들의 이주역사는 그해 9월 10일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 중간 지점인 라즈돌로예역을 떠나 한달여간 머나먼 6000㎞나 떨어진 카자흐스탄의 알마티와 인근 우슈토베,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 남부 등 허허벌판으로 흩어지면서 시작됐다.그때 강제이주된 한인은 카자흐스탄에 2만170가구 9만5256명,우즈베키스탄에 1만6272가구 7만6525명 등 17만1781명에 달했다.중앙아시아의 광활한 벌판에 버려진 러시아 이주 한인,즉 ‘고려인’들은 또다시 혹독한 추위와 배고픔을 이겨내야 했다.중앙아시아를 개척한 고려인들은 1990년대 소련 붕괴 이후 마음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연해주로 재이주하기도 했지만 서쪽의 우크라이나,핀란드에 이르는 유라시아 대륙까지 뻗어나갔다.

▲ 고려인 강제이주 장면을 연출한 삽화(국립민속박물관 제작) .
▲ 고려인 강제이주 장면을 연출한 삽화(국립민속박물관 제작) .
현재 러시아 내 한인들은 80년전 강제이주된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등에 30만명,연해주와 사할린에 10만명,러시아 본토에 10만명 등 대략 50만명으로 추정되고 있다.이미 고려인 5~6세대는 사실상 ‘러시아인’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현지인이 됐다.그들이 최근들어 다시 주목받는 이유는 우리나라가 유라시아에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고단한 삶을 이겨내고 머무는 곳 마다 아리랑의 혼을 남긴 고려인들은 ‘아리랑로드’의 개척자인 셈이다.

진용선 아리랑박물관장은 “고려인아리랑에 담긴 대표적인 정서는 한마디로 ‘디아스포라(Diaspora)’라고 할 수 있다”며 “고향을 그리지만 유배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집단적 트라우마가 내재하기에 원했던 원치 않았던 간에 고향을 등진 이들에게 아리랑은 보편적 디아스포라의 노래라고 요약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박창현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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