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나하( 본명 최낙중)

면접관은 모두 다섯 명이다.그들이 앉아있는 탁자는 면접자가 앉는 1인용 나무의자를 중심에 두고 반원으로 길게 휘어져 있다.그들은 정확한 간격을 두고 앉아있다.면접자 정면에 한 명,반원 탁자 양 끝에 한 명씩,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또 한 명씩.

면접자의 의자는 직각이다.등받이가 엉덩이 받침대와 직각을 이루고 다리 네 개 역시 수직으로 서 있어서,옆에서 보면 알파벳 소문자 에이치(h)를 어느 직각 편집증 환자가 자를 대고 그린 것 같은 그런 의자다.의자 모양새를 따라 그 위에 앉은 내 몸도 직각이 되었다.

“서민하 씨.”

면접관 중 누군가 나를 불렀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서민하 씨?”

나는 고개를 젖혀 숨을 내쉬었다.푸흣,하고 신음소리 비슷한 파열음이 났다.비로소 마른 입천장에서 혀가 떨어지고 대답이 나왔다.

“에엣!”

“서민하 씨 맞아요?”

“네에에.”

대답인지 한숨인지를 내뱉고 나자 내 눈앞에 갑자기 하얀 막이 펼쳐졌다.나는 티 안 나게 눈에 힘을 모아 그 막을 다시 보았다.정면에 앉은 면접관이 A4 복사용지 한 장을 들어 내밀고 있었다.긴장 탓인지 그 작은 종이때기 하나가 시야를 가득 메웠던가 보다.

…침착, 죽어도 침착.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되레 더 침착하기 어려워졌다.면접관 다섯 명의 생김새가 다 똑같지 않은가.그들은 누렇고 갸름한 얼굴에 이목구비뿐 아니라 앞이마 튀어나온 거하며 움푹 꺼진 눈자위의 검푸른 빛까지 똑같다.

차림새도 그렇다.검은색 슈트 상의에 흰 셔츠,격자무늬가 돋을새김 된 감청색 넥타이.어깨 핏은 매끈하고 슈트 소매 밖으로 살짝 나온 셔츠 깃은 자로 재도 1.5㎝ 정확할 것 같았다.그들은 다섯 쌍둥이가 분명해 보였다.그것도 일란성.착시인가 싶어 눈을 빠르게 깜빡여 보았다.역시 마찬가지.고개까지 내둘러 볼 수는 없었다.나는 맨 왼쪽 면접관을 1번으로 하여 차례로 번호를 매겨두었다. 정신 차리고 갈피를 잡기 위한 나름의 준비였다.

정면에 앉은 3번이 들고있던 복사용지를 내리고 나서 묻는다.

“이 종이,무슨 색이죠?”

“예,그건 하얀색입니다.”

3번이 고개를 갸웃한다.갸웃한 방향 그대로 제 왼쪽의 4번과 5번을 둘러본다.4번은 서양식으로 어깨를 한번 으쓱했고 5번은 뭔가가 지겨운 듯 눈살을 찌푸린다.

짧은 침묵이 흐른 후,2번과 4번이 동시에 종이를 들어 올린다.3번이 그 종이들을 좌우로 흘낏대며 재차 묻는다.

“서민하,잘 봐요.이게 무슨 색인가.”

“… …”

“자,무슨 색입니까?”

나는 말문이 막혔다.그러나 대답했다.

“예,그건… 그건,흰색입니다.”

2번과 4번이 소리 나게 종이를 내려놓는다.특히 4번은 콧김 새는 웃음에다 씨…,뭐라는 강한 소리까지 버무려 굴린 것 같다.3번은 굳은 표정으로 나를 쏘아본다.나는 그 시선을 받아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여차하면 몰매라도 놓을 것 같은 분위기다.

저들의 마음에 드는 답을 말할 때까지 어딘가로 끌려가 갇힐 수도 있을 것 같다.그게 터무니없는 생각인 줄 알면서도 그랬다.

“서민하 씨,긴장을 너무 했어.지금 뭔가를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게 어떻게 흰색입니까? 흰색이 뭔지 몰라?”

3번이 종이를 들어 올리고 흔든다.나는 내가 정말 뭔가를 착각하고 있지 않나 싶어졌다.‘흰색’이라는 말과 그것이 의미하는 실제 색깔이 이제까지 알고 있던 것과 사실은 다른 건 아닌가.달라진 건 아닌가.복사용지의 색을 지칭하는 가장 적확한 말이 따로 있는 건 아닌가.

에스키모들은 눈(雪)을 의미하는 단어가 수십 가지나 되어서 내리거나 쌓인 모양새에 따라 용도에 따라,또 날씨에 따라서도 구분해 쓴다지 않나.저들이 지금 종이색깔을 꼬투리 삼아 표현의 엄밀함과 정확성을 요구하는 것이라면,그렇다면 큰일이다.흑백과 빨주노초파남보 정도 외에 색깔에 대해 내가 아는 게 뭐냐.

5번이 버럭 소리를 지른다.

“말 안 해? 그럼 나가!”

나는 반사적으로 그를 돌아보았다.소리를 그렇게 질렀으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까지는 아니어도 그 기색에 짜증이라든지 귀찮음 같은 게 묻어 있어야 할 텐데,아니었다.그는 되레 석고상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더 꾸물댈 수는 없다.거의 무의식중에 내 입에서 튀어나간 말은 이것이었다.

“시간!”

나는 잠시 눈을 끔벅대다 말했다.

“시간을 좀 주십시오.꼭 정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엔 4번이 뭐라 채근을 하려다가 3번의 눈짓을 받고 입을 다문다.3번이 중얼댄다.

“정답… 좋아,정답.”

그의 비아냥 섞인 대답을 듣고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아,이런 게 바로 압박면접이란 거구나.질의응답 중 면접자가 식은땀에 눈물까지 흘린다는,그러나 맞닥뜨려본 적 없던 나 같은 취준생에겐 그 비참하고 궁벽스런 물기마저 선망의 대상일 수밖에 없는 기이한 면접.오늘 네가 타고 온 지하철에 안경 쓴 사람은 몇 명이었냐고 묻는다거나 너희 동네 맨홀 뚜껑이 왜 둥근지를 설명하라커니,날아오는 총알을 맨손으로 잡을 방법을 말하라커니.

면접 대비 사이트나 블로그에서 대기업 인사담당 부장님들 말씀을 포스팅해 놓은 걸 보면 이런 질문엔 정해진 답이 없다고 했다.없을 수밖에.그런 걸 알면 취직을 왜 해,바로 세계 정복에 나서지.그래,저 사람들은 지금 나한테 종이 색깔을 묻고 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닌 거야.저희가 억지를 쓰면 내가 어떻게 나오는지를 보려는 거다.그렇다면… 나도 옛날 사람들 선문답하듯이…

①벌떡 일어난다 ②저들에게 뚜벅뚜벅 걸어간다 ③ 종이를 나꿔채 찢어버린다 ④ 그리고 따귀를 한 방씩 멕여?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종이가 흰색이 아니라면…”

이렇게 말하며 한 걸음 크게 나섰다.그 다음,다섯 면접관 모두에게 돌아가며 90도 인사를 올렸다.큰절을 할까하다 오히려 유난떤다는 인상을 줄지도 몰라 그 정도 했다.인사 직후 저들의 표정이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배에 힘을 주고 말할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성실히 듣고 잘 배우겠습니다.”

“그게 정답입니까.”

3번이 종이 든 손을 까닥여 나를 다시 앉히고,그 손끝을 퉁겨 테이블 밑으로 종이를 떨군다.복사용지는 허공에서 유려하게 몸을 뒤채며 떨어진다.그리고 대리석 바닥을 미끄러져 내 발밑에서 반듯이 멈춘다.

순간 한 생각이 번뜩했다.아,지금 이건 꿈이 아닐까…? 나는 무릎 위에 단정히 얹은 손을 꼼지락거려 오금을 꼬집어보았다.아프다,당연히.

3번이 제가 떨군 종이를 가리킨다.팔목을 움직여 몇 번인가 손가락질을 하듯 가리킨다.

“그건 검은색 종입니다,검은색.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종이와 3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5번이 말소리를 높인다.

“우리말 몰라? 검은색! 아니야?”

나는 종이만 내려다보았다.그저 그러고 있었다.저 백지에 이마를 쾅쾅 내리쳐 박고 나면 답이 나올까….그때 강렬한 기시감이 들었다.

이게 지금,이런 답 없는 질문을 받고 식은땀을 흘린 게 처음이 아니었던 것이다.처음은 군대에서였다.자대 배치 첫날,신병 신고식 때 선임들이 물었다.공룡 다리가 몇 개냐? 두 갭니다.아,네 개인 것도….

네가 봤어? 보지 못했다고 하자 왜 확실하지도 않은 보고를 하느냐며 때렸다.질문은 계속되었다.

개 다리는 몇 개냐? 네 갭니다.자식 모르는 게 없네.그럼,까마귀는 다리가 세 개냐,네 개냐?

망설이다 복불복 네 개라고 하자 삼족오도 모르는 무식한 놈이라며 ‘대가리 박아’를 시켰고 그 상태에서 얼른 세 개라고 했더니 새도 한번 안 봤느냐며 옆구리를 걷어찼다.

그래서 그젠,예,까마귀 다리는 두 갭니다! 하고 악을 써 답하자 기상,이라고 했다.약간은 안심하고,그러나 여전히 벌벌 떨리는 다리로 일어서자,그럼 까마귀가 사람이냐며 이단옆차기가 날아왔다.그 발길질에 뒤로 넘어졌다가 관등성명을 대며 일어났을 때 들이닥친 질문은 이것이었다.다리 두 개 달렸다고 다 사람이냐?그때나 지금이나 어차피 답은 없는 것이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예,이 종이는… 검은색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대답이 어디 있나?”

“보는 사람에 따라서… 예를 들어 개 눈에는 사물이 흑백으로만 보인다던데,만일 어떤 개가 흰색 색맹이라면 모든 게 검은색으로 보이겠지요.”

말을 하고나자 어금니가 절로 꽉 물렸다.너 방금 무슨 말을 한 거냐…! 나는 눈을 감았다.그러면 안 되는 줄 알고 있었지만 판결을 기다리는 중죄인의 심정이라 눈꺼풀이 떨어지지 않는 걸 어쩔 수 없었다.

실내를 꽉 메운 침묵의 입자들은 마른 침 넘기는 내 목젖의 껄끄러움마저 놓치지 않고 그 소리를 증폭시켰다.

“이거 봅시다.”

3번의 목소리.나는 눈을 떴다.3번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오래 뜸을 들이다 말한다.

“서민하 씬 우리 세중이 어떤 덴 줄 아직 모르는 것 같군요.”

“예? 예… 아,아닙니다.세중그룹 입사는 제 오랜…”

“그렇지.많은 사람들의,아주 많은 사람들의 오랜 꿈입니다.몇 년 전에 우리 회사에 입사한 한 직원의 모친은 아들이 유치원 때부터 여기 들어오는 걸 인생의 목표로 정했다고 하더군.그래서 그 아들하고 온갖 수험생 생활을 함께했다고 하는데… 아들이 입사하고 얼마 안 있다 돌아가셨지.그분 유서에 적혀 있었다는 구절,그 얘기 들어봤지요?”

“예,워낙 유명한 얘기니까요.”

“뭡니까?”

“다 이루었다….”

“그렇지.우리 세중은 그런 회삽니다.”

세중그룹에서는 그 모친에게 회장 명의의 장한 어머니 표창장을 ‘추서’하고 아들은 1직급 특진을 시켜,그룹 이미지 광고에 대대적으로 활용하였다.

그러나 그 어머니에 대한 인터넷 소문은 여러 가지 버전이 있었다.그 중 하나가 자살설이다.‘다 이루었다’란 말은 어느 버전에나 등장하는 것이지만,자살설에만 유일하게 들어있는 구절도 있다.아들의 그룹 입사 후 그녀는 인생이 허망하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20여년 세월 애 고생시키며 뒷바라지 해온 게 결국 휴일도 없이 새벽출근하게 만들려는 것이었나 싶으면 평생 바보처럼 산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애한테 미안하다는 하소연이었는데,그런 하소연도 어디 가서 마음껏 할 수 없었다.굶어죽게 된 사람 앞에 와서 밥투정 하냐는 삿대질도 받았고,성공 스트레스는 그 자체로 행복이니까 그 허탈함을 마음껏 즐기라는,딴에 그럴 듯한 충고를 해주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바로 그 대목에서 이 구절이 나온다.

‘이제까지 나와 내 아들의 삶은 삶이 아니라 유사 삶 행위였다.’

이 ‘유사 삶 행위’는 특유의 야릇한 어감 때문인지 세중그룹의 이미지 광고 못지않게 널리 회자되었다.그건 주로 인터넷과 SNS 상에서 돌아다닌 것인데,예를 들자면 끝도 없지만 이런 식이었다.



‘세중에 들어가는 건 유사 삶 행위다’에서 ‘세중은 유사 삶 행위를 시킨다’로 표현이 변형 내지 발전을 했고,그러다 유사 삶의 ‘삶’이 ‘성’으로 바뀌면서 댓글 특유의 막말은 불꽃놀이 폭죽처럼 무수한 갈래로 뻗어가며 반짝이며 타락 내지 진화를 거듭했다.그 다양하고 질 낮은 변화의 흔적들은 <세중유사>란 블로그에 일괄 정리되어 있었지만 그 운영자가 누군가로부터-아마도 그룹 홍보실로부터 고발을 당하면서 블로그 자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들리는 소리로는 그룹 홍보실장이 경질되고,댓글에 대응하는 댓글팀이 회장 직속의 비서실 내에 따로 꾸려졌다고도 한다.‘유사하다’는 말은 물론이고 그와 유사한 ‘사이비’란 단어,하다못해 ‘행위예술’까지도 세중그룹 임직원과 그 가족들 사이에선 금기어가 되어 있다며 면접이나 기타 관계자 접촉 시 각별히 유의하라는 트위터 글도 본 바 있다.

어쨌거나 모든 버전의 이야기에서 공통 사항은 인생살이 최대 고비에서 한 시름 놓게 되자 어머니가 갑자기 죽었다는 점,아들은 어머니를 기리며 더 열심히 회사를 다니고 있다는 점이었다.그는 상중에도 문상객이 뜸한 낮 시간 반나절씩은 회사 일처리를 했다는데,그 얘기 또한 직장인 미담으로,혹은 노동자 역적질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미담이든 험담이든,세중이 아닌 다른 그룹이었다면 그 입사 관련 에피소드는 그렇게 여러 버전으로,그렇게 널리,오래 퍼져나가진 않았을 것이다.

정도의 차이가 다소 있을 수 있겠지만 나에게도 세중은 그런 회사였다.면접관 3번이 말한 ‘그런’.

그룹 이미지 광고에서 국민엄마라는 여배우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치어다보는 그런.

ARS로 서류 통과를 확인한 날 나는 심장이 너무 괴상하게 뛰어서 청심환을 먹었고,겁이 나 119를 부를까도 했었다.

3번이 말한다.“꿈은 누구나 다 이루는 게 아닙니다.그래서도 안 되고.천국에 정원(定員)이 없으면 그건 천국도 뭣도 아니지.나가보세요.”

순간 내 볼 살이 푸들거리는 게 느껴졌다.누군가의 억센 손이 가슴을 꽉 움켜쥔 듯한 통증이 일었다.“나가라니까.”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내 온 신경과 의식이 작은 꼼짝임도 허락하지 않았다.취업 3수에 접어들자 여자 친구가 떠나갔다.취업하면 만나자며 돌아서가는 그녀를 그저 바라만 보았다.멀어져 가는 그녀의 등이 코끼리 엉덩이처럼 커다랗게 보이기도 했고 사막 한가운데의 선인장 가시처럼 작게도 보였다.

그때 어째 아랫배가 살살 아파왔고,점심으로 먹은 제육 컵밥이 딴 날보다 까닭 없이 700원이나 쌌다는 생각이 나자마자 엉덩이께가 찌릿해왔다.설사기였다.그것도 아주 급한.화장실,화장실! 나는 거리의 아무 건물에나 뛰어들었다.그날 밤 내내 설사는 멈추지 않았다.고시원 현관문 밖에 있는 화장실을 계속 들락거려야 했지만 그 짬짬이 나는 노트북에 띄워놓은 세중그룹 양식의 이력서와 자소서 파일을 들여다보곤 했다.

3번이 나를 빤히 보고 있다.어,쟤 봐라 하는 양의 그 시선을 나는 힘을 다해 맞받고서,말했다.

“원하신다면… 이 종이에다가… 구두약이라도 칠해 오겠습니다.”

3번은 말이 없다.저들은 말이 없다.내 뇌리에는 ‘아,나 왜 이러냐!’,하는 절규가 울려 퍼졌다.

이 종이는 검습니다,죽도록 검습니다,만일 아니라고 하는 놈이 있으면 내가 가만두지 않겠습니다!…,왜 이렇게 못해,왜!

그때,

“정치인,과학자,4성 장군.”

4번이 불쑥 나선다.

“네가 아까 지구에 남긴 사람들인데… 이유가 뭐야? 다른 번호를 썼다가 지운 자국은 또 뭐고.”

그랬다.나는 핵전쟁으로 폐허가 된 지구에 4번이 말한 그 세 사람을 남겼다.면접을 보기 전 대기실에서 이런 설문이 있었던 것이다.

핵전쟁으로 하기의 사람들 13명만 살아남고 지구는 죽음의 별이 되었습니다.이제 생존자들은 단 하나의 소형 우주선을 타고 다른 별로 이주를 하려 합니다.연료가 부족하여 한번 떠나면 우주선은 다시 돌아올 수 없습니다.한데 우주선의 정원은 조종사 포함 10명뿐입니다. 

①우주선 조종사(여/48세) ②5선 정치인(남/64세) ③임신부(여/32 세) ④국문학 전공 대학생(남/22세) ⑤4성 장군(남/57세) ⑥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과학자(여/48세) ⑦무직 노숙자(남/46세) ⑧중학생(여/15세) ⑨기업인(남/55세) ⑩농부(남/35세) ⑪영화배우(여/27세) ⑫다리를 저는 전직 마라톤 선수(여/25세) ⑬가톨릭 신부(남/ 7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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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누구,누구,누구를 지구에 남기겠습니까?

즉,저 13명 중 새로 누굴 죽일 것인가 결정하라는 얘기였다.어렵고 난감했지만,그래도 잘 보면 답은 있는 듯도 싶었다.신이고 사람이고 다 죽어나간 마당에 늙은 성직자가 무슨 필요 있나.무직 노숙자가 다른 별에서라고 빠릿빠릿할 수 있을까.안 됐지만 다리를 저는 전직 마라토너는 새로운 환경에서 그다지 쓸모 있어 보이지 않는다.

처음 나는 저 세 사람의 번호 ⑦ ⑫ ⑬을 적었다가,지웠다.그리고 다른 번호-② ⑤ ⑥을 써 넣었던 것이다.

내가 말했다.

“저는…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살아남은 사람들 중에 지구를 그렇게 만든 데 조금이라도 더 책임이 있을 것 같은 사람을 찾아본 겁니다.”

“처음에 쓴 건?”

“이주해 갈 별에서 이 사람이 과연 쓸모가 있을 것이냐를 먼저 생각했던 거지요.”

“근데?”

“사람의 생명을 쓸모로 판단할 수는 없을 것 같아서…….”

4번이 웃는다.웃으며 중얼댄다.이런,우린 무조건 쓸몬데.옆의 5번이 4번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한다.

진짜 그래? 4번이 더 크게 웃는다.하긴,이 마당엔 쓸모도 쓸모없지.그 말에 5번도 피식 웃으며 자신의 그 웃음을 튕기듯 크게 말한다.

“왜,기업인도 남기지.나 같으면 기업인부터 남기고 본다.”

다들 웃는다.콧김을 섞기도 하고 어금니 새로 웃음을 깨물기도 하며 다들 웃는다.웃음 같아 보이진 않는다.나도 따라 웃어야 하는지 어떤지 순간 헷갈려서 나는 입가에 억지웃음을 머금다 말다 했다.

3번이 말한다.“서민하 씬 상상력이 부족한 것 같구먼.”

“어떤…”

저봐,저.4번이 혀를 찬다.3번이 말한다.

“지금 이건 무슨 설문이나 심리 테스트 따위가 아닙니다.실제 상황이라고.알아? 생존자들에겐,아니 우리에겐 앞으로 핵전쟁보다 더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아니,그렇게 될 거야.저 무지막지한 우주 공간에서 무슨 위기나 개고생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이런 때 뭐가 제일 중요하겠나.”

그는 한 호흡 뜸을 들이다 제 스스로 답을 한다.

“다가올 세계에 대한 효과적인 싸움과 적응! 그래야 또 살아남을 거 아닙니까.그게 도덕이지,생존 도덕.거기 맞지 않으면 도태되는 거고.지구가 어떻게 됐든 그건 이미 그렇게 된 거야.책임? 그 마당에? 가만 보면 상상력 없는 것들일수록 이 생존 도덕이 없거든.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숨을 들이켜며 고개를 끄덕였다.세상에 다시없을 위대한 사상을 전수받은 것 같은 얼굴로 보이고 싶었다.음성도 떨려 나왔다.이건 내가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제가 뭔가 잘못 생각해 온 거라면……”

말이 끝나기도 전에 4번이 나를 향해 제 왼손을 들어 손목을 두어 번 턴다.나가,나가.

나는 직각 의자에서 직각으로 굽은 몸을 펴 일어났다.그때,나도 모르는 읊조림 하나가 톡 떨구어졌다.열심히….그리고 되뇌어졌다.열심히… 열심히… ….

“열심히? 열심히 뭐?”

3번이다.4번이나 5번 같기도 하다.저들은 옅은 웃음을 머금고 있다.3번이 출입문 쪽을 가리킨다.그 손짓에 최면이라도 걸린 듯 나는 몸을 돌렸다.등 뒤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온다.완전 애네.대졸 맞아? 누군가 나를 부른다.이봐,라고 한다.나는 대답도 없이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2번이다.그때까지 별 말이 없던 사람이 불렀다는 사실에 왈칵 기대가 일었다.지푸라기 같은 것일망정 왈칵!

2번이 조금 뜨악한 표정으로 말한다.

“뭐,그렇게 바라볼 건 없고… 당신 괜찮나 해서.”

“예?”

“지금 얼굴이 너무… 아니,보기보단 괜찮은가? 나가면 병원부터 한번 가보든지.”

“고맙습니다.그리고 저는……”

이건 마지막 기회다.뭔가 좋은 것,뭔가,저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그 뭔가를… 이제까지 살아온 중에 그 짧은 동안 머리가 가장 빠르게 돈 듯도 싶고 그저 가슴만 벌렁댄 듯도 싶었지만 어떻든 그 뭔가는 끝내 떠오르지 않았다.나는 머쓱히 선 채 저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두서없이 바라보다 고개를 떨구었다.

1번이 말한다.그 역시 나서지 않던 사람이다.

“아마도 넌 우리가 야속할 거다.난 잘 할 수 있는데.시키는 거,가르쳐 주는 건 뭐든 열심히 할 건데… 그렇지?”

말투와 음색에 진지함과 빈정거림이 하나로 붙어있다.내 시야가 흐릿해졌다.눈물이 차오른 것이다.그가 틈 없이 말을 이었다.

“사실 이런저런 스펙 따위 입사하고 나면 그런 걸 어따 써? 네팔이나 안데스 오지 배낭여행을 했다는 게 서울시내에서 그게 대체 무슨 소용이냐고.요는,얼마나 빠르고 철저하게 내가 입력하고 누르는 대로,내 손가락처럼 작동할 수 있는가… 그거야,회사는.열심히? 고성능은 열심히 안 열심히 개념이 없다.그래야 고성능인 거야.꼭 성능 안 좋고 사양 낮은 것들이 티를 내요.오작동만 열심히 하는 거지.그럼 어떻게 돼? 죽이고 싶어진다.실제로 죽이기도 하지만 그런 것들은 죽었다 깨도 안 돼.아예 플러그부터 잘못 끼워져 있으니까.

구구절절 옳은 말인 것 같았다.옳을 것이다.내 입에서 나 자신조차 깜짝 놀랄 말이 튀어나온 건 바로 그때였다.

“잘못했습니다.제가 잘못했습니다.”

말과 함께 눈물이 흘렀다.주체할 수 없이 흘렀다.뭘 잘못했는지는 알지 못 한다.다만 잘못한 것이다.나는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꺽꺽 말했다.딸꾹질처럼,어쩔 수 없는 꺽꺽.

“세,세중그,룹 부,붙여만주,시면… 죄송합,니다.자,잠시,만 좀…….”

나는 양해를 구하고 말을 멈추었다.남은 눈물을 두 손으로 찬찬히 닦고 크게 한번 호흡을 고른 다음,나는 새롭게,있는 힘을 다해 말하였다.

“붙여주시면 회사에 제 두 눈과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다 똑같이 생긴 다섯 면접관은 말없이 저희들 서로간의 얼굴을 이리저리 마주 본다.

3번이 말한다.

“그 종이 무슨 색입니까.”

나는 내 발치의 종이를 보지도 않고 목이 터져라 크게 대답하였다.

“검은색입니다! 검은색입니다!”

면접장은 개의 색맹 얘기가 나왔을 때만큼이나,아니 그보다 더 조용해진다.모든 움직임이 일시 정지한다.내 거친 숨소리만 실내에 가득했다.2번이 말한다.나를 바라보며 말하지만 딱히 내게,혹은 다른 누군가에게 하는 말 같진 않다.

“사실 난 서민하가 이건 패 죽인대도 흰색이라고 우기길 바랐어.그런 놈 한번 보고 싶기도 했고 또… 한 100만 년쯤 전인가 엊그제인가는 나도 색맹 아닌 적이 있었으니까……”

마지막 음절 ‘까’를 길게 끌며 말을 마친 그의 표정은 면을 다 건져먹은 짜장면 그릇처럼 어둡고 어딘지 개운치 않은 찌꺼기 같은 게 있어 보인다.

누군가 2번의 말을 받는다.언성이 살짝 올라가 있다.

“아니지! 그때가 색맹이었지,너나 나나.”

흰색,검은색,흰색,검은색…….

하도 신경을 곤두세웠던 탓인지 눈앞이 온통 하얘져 왔다.새카매진 것 같기도 했다.그때,아,검거나 희거나 그게 다 마찬가지였구나.여긴 그런 데였어.나는 뒤늦게 깨달음을 얻었다.몸이 휘청했다.희한하게도 출입문 쪽으로 내딛는 걸음엔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몸이 붕 뜨는 듯,동시에 폐허가 된 지구에 홀로 남겨진 듯한 낭패감과 고요.그 고요를 헤집고 누군가의 신음소리가 들렸다.귀에 익숙한 음성이다.이러다 면접비… 면접비 10만 원 아직 못 받았는데.그거 믿고 카드로 구두 산 건데… 그거 받아야 되는데…….

뒤통수가 저릿해 왔다.‘면접비’가 내 발바닥에 다시 땅 딛는 감촉을 가져다주었다.주변 허공 여기저기에서 파리 날개소리처럼 웽웽,아리송한 말들이 떠돈다.그 말들은 들린다기보다 감촉되는 듯하다.



쟤 재밌지 않아?

붕어빵은 아니네

올려놓게?

일단

조립 한번 해보신다?

그러다 아니면?

파쇄기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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