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살갗과 바위들, 민낯의 땅서 얻은 평범한 행복
히말라야산맥 해발 3500m 위치
6월∼9월 뺀 다른달 영하 25도
마른 땅 채워준 푸른 보리물결
낯선 여행자 배려·나눔 있는곳

마른 바람이 마음도 뚫고 들어올 것 같은 휑한 이곳으로 다시 왔다. 푸른 숲과 울창한 산을 오르내리다가 처음 이 땅에 발 디뎠을 때의 당황스러움이란!

히말라야나 안데스,알프스 같은 큰 산맥이 품은 산들의 넉넉함에 익숙했던 나에게 붉은 살갗과 바위들이 그대로 드러난 민낯의 라다크는 마치 지구 밖으로 나와 우주 어딘가에 와있는 느낌이었다.

두 발을 디딜 수 있는 가장 낮은 곳이 백두산 천지보다 한참 높은 해발고도 3500m.라다크 왕국의 수도였던 레.

‘오래된 미래, 라다크로부터 배운다’라는 책을 통해 저벅저벅 내게 다가온 땅.

지도상으로는 분명 인도지만,장엄한 히말라야 산맥에 자리한 라다크는 중국,파키스탄과 등을 맞대고 그 중심에 걸쳐있는 땅이다.

▲ 마카밸리 트레킹에 나선 트레커들
▲ 마카밸리 트레킹에 나선 트레커들
10세기경 티베트 제국의 일부가 이곳으로 건너와 세웠다고 전해지는 라다크 왕국은 900년간 독립을 유지했다고 한다.지금의 땅을 넘어 파키스탄 일부까지 포함할 만큼 웅장했던 시절,인도와 중앙아시아를 잇는 실크로드였던 찬란함은 빛바랜 과거가 되었고,왕국은 허물어지고,번성했던 계곡에는 무너진 성채만이 그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아무것도 없을 것 같아 보이는 곳에 여전히 보리와 밀의 씨를 뿌리고,히말라야에서 흘러내려오는 가는 물줄기로 푸른 생명을 키우며 자리를 지켜내고 있는 이 곳 사람들.

마카밸리 트레킹을 하며 만난 여인은 내게 히말라야 빙하물로 키운 노란 살구 두 알을 내밀었고,나는 점심도시락에 들어있던 과자와 빵을 꺼냈다.‘안녕하세요!반가워요!잘지냈어요?잘지내요.안녕히 가세요!’이 모든 경우 다 쓸 수 있는 인사,줄레이.우리는 만날 때처럼 헤어질 때도 “줄레이~줄레이~”짧지만 깊은 눈맞춤으로 인사를 나눴다.

걷다가 만난 작은 물레방앗간.세상에,여기도 사람 사는 곳인데 방앗간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어른 둘이 등을 구부리고 들어가서 작업을 할 수 있을만한 크기이다.보릿가루가 곱게 저 혼자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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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식하는 트레커들
“누가 와서 퍼 가면 어떻게 하죠?” “그래도 돼요.얼마나 배고프면 그러겠어요.” 고소한 냄새 때문인지,많지 않은 살림조차 배고픈 이에게 나눌 수 있는 마음 때문인지,곱게 쌓인 보릿가루에 손이 간다.한 줌 콕 집어 입에 넣고 오물거리니 기분 좋은 맛이 온몸으로 퍼진다.

6월에서 9월,일 년에 겨우 넉 달만 곡식이 자랄 뿐 나머지 여덟 달은 영하 25도,30도까지 내려가는 라다크에서는 겨울이 오기 전에 혹독한 시간을 버틸 보릿가루와 말린 채소를 준비한다.그리고,평균고도 4천미터가 넘는 창탕고원에서는 창파족 유목민들이 양과 염소,야크를 몰아 1년에 10번이 넘게 풀을 찾아 이동을 한다.말이 4천,5천미터지,의식주는 물론 공기마저 부족한 곳에서 대대로 유목생활을 해오고 있다는 것이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상상하기 어렵다.천막 안이 궁금하다는 여행자의 호기심을 버터차로 맞아주고,다음 달이면 온 가족이 함께 야크털로 짠 천막을 걷어 다른 곳으로 이동하니 지금 잘 왔다고 토닥여주는 쏘남 도르지 아주머니.천진하게 웃는 모습에서조차 창탕고원의 바람을 이겨낸 강인함이 느껴진다.

▲ 인도 라다크 승려들이 달라이라마 법회에 참석하고 있는 모습.
▲ 인도 라다크 승려들이 달라이라마 법회에 참석하고 있는 모습.
고도가 높아질수록 공기는 차가워지고 산소는 희박해지는데,눈이 맑아지고 귀가 더 밝아지는 느낌은 무언가.붉은 산들 사이 마카밸리 계곡을 푸르게 흔들던 보리,노랗게 익어 후두둑 떨어지던 살구,햇살에 잘 익은 살구 두 알을 건네던 여인과 굳은 살 너머 뜨거운버터차로 지친 길손을 토닥이던 유목민 모녀,그리고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푸르게 아름답던 초모리리 트레일의 그 모든 생명들.꽉 찬,무엇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도시에 있다가 나무 한 그루도 소중하게 빛나는 땅을 걸으며 머물던 짧은 순간들을 떠올린다.

누군가에게는 가혹한 현실일 수 있는 이 땅에서 오히려 사람과 자연의 온기가 느껴진다.나무 한그루 없이 이어지는 민둥산에 들어가 걸어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일.손톱만한 풀꽃부터 한 뼘 크기로 자란 들풀까지 얼마나 치열하게 마른 땅을 움켜쥐고 버텨내고 있는지.

고원의 찬바람과 겨울의 혹독한 추위,먹성 좋은 양과 염소들이 비켜간 자리를 온전히 지켜내고 있는 자세히 봐야 보이는 작은 생명들.이 땅에서 존재한다는 것은 그렇게 온 힘을 다해 얻어낸 평범한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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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카밸리

>> 이상은
히말라야 니레카봉 세계최초 등정.터키 최고봉 아라라트 한국최초 등정.여행문화센터 산책 대표.한국여성산악회 이사.KBS 2TV ‘영상앨범 산’출연.KBS1라디오 <이상은의 남다른 여행> 진행 중.저서로 ‘대한민국 트레킹 바이블’,‘세상의 끝,남미 파타고니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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