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년전 하회 ‘길지’ 터잡은 풍산류씨 4대 걸쳐 대명당 묘소
하회 주혈 600년 넘은 삼신당 느티나무
풍산 류씨 대종가‘ 양진당’ 양택 명당
류자온 묘소 발음 손자·증손자 결실 맺어
묘역 혈처 역량 토요타자동차 선영 능가

▲ 하회마을 맥로도. 가운데 홍선이 주혈(느티나무)로 들어가는 맥로, 우측이 양진당으로 들어가는 맥로.
▲ 하회마을 맥로도. 가운데 홍선이 주혈(느티나무)로 들어가는 맥로, 우측이 양진당으로 들어가는 맥로.
문재인 대통령 내외는 추석 연휴기간 중에 안동 하회(河回)를 방문했다.서애 유성룡 선생의 고택인 충효당과 영모각을 둘러보고,풍산 류씨의 대종택인 양진당을 방문해 차담을 나눴다.방명록에는 ‘재조산하(再造山河)와 징비(懲毖)의 정신을 되새깁니다’라는 글을 남겼다.이어 문대통령은 하회 별신굿 탈놀이를 관람하고,참가자들과 함께 어깨 춤을 추는 여민동락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또한 서애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는 병산서원을 둘러보았다.

풍수인들에게 하회는 로망이다.기실 하회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전파한 숨은 공신은 풍수인들 일 것이다.20여 년 전,풍수에 갓 입문했을 때 여러 번 찾아간 곳이 하회이다.양진당 소슬대문에 서면 눈 앞에 다가오는 문필봉(文筆峰)의 자태,흐릿한 달 빛을 맞으며 만송정의 솔 바람 숲을 거닐던 기억이 여전히 선연하다.

풍산 류씨들이 600년을 세거해온 하회에 어찌 풍수 전설이 없을 수 있겠는가.풍산 류씨는 본래 풍산 상리에 살았는데,제7세 전서(典書) 유종혜(柳從惠)가 몇 년간을 화산(花山)에 올라 산세와 물의 흐름,기후조건 등을 관찰한 후에 하회로 이주할 것을 결심한다.화산 중턱에는 이미 허씨와 안씨가 살고 있었으니,강가의 나지막한 언덕을 골라 집을 짓기로 하였다. 집을 짓는데 기둥이 3번이나 넘어져 낭패를 당하던 중 꿈에 신령이 현몽하기를 이 터를 얻으려면 3년 동안 활만인(活萬人)하라는 계시를 받고 큰 고개밖에 정자를 짓고 지나가는 행인에게 음식,노자 그리고 짚신을 나누어주는 활인을 하고서야 하회의 터전을 마련하였다.이후 가문이 번성하고 류중영, 류운룡, 류성룡 등의 명신을 배출하게 되었다.

▲ 양진당 (또는 입암고택)
▲ 양진당 (또는 입암고택)
하회(河回)란 마을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낙동강 물이 ‘S’자 모양으로 마을을 감싸고 흐르는데서 유래한다.태백산에서 내려온 해발 300여m의 화산(花山)이 있고,이 화산의 줄기가 마을의 서쪽 끝까지 뻗어 수령 600년 된 느티나무가 있는 곳이 마을의 가장 높은 중심부에 해당한다

많은 풍수가들은 하회의 형국을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또는 다리미 형국이라 부르고, 산태극 수태극을 이루는 길지라고 한다. 그러나 어디가 길지이고 그 길지의 역량은 어떤지를 구체적으로 밝힌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하회의 주혈은 수령 600년이 넘은 삼신당 느티나무가 자리한 곳이다.맥로의 출발은 청송 진보면 방향이다.가까이로는 화산을 거쳐 마을입구로 내려온 맥이 마을 북쪽의 인도를 따라오다 만송정에서 90도 각도로 방향을 틀어 느티나무를 향하여 진입하여 결혈하였다.천하대지를 방불하는 대명당이다.

입향조(入鄕祖)인 유종혜가 처음 자리잡은 곳에 지어진 건물로 전해지며,임진왜란 때 일부가 소실 된 것을 17세기에 중수하였다.양진당(養眞堂)은 풍산 류씨의 대종가(大宗家)로 사랑채에 걸려있는 입암고택(立巖古宅)의 당호는 류중영(1515~1573)의 호(號)에서 취한 것이다.이곳에서 겸암과 서애가 태어났다.양진당은 주혈에서 분지한 한 지맥이 빈영정사를 경유하여 양진당 마당에서 고택을 향하여 결혈하였다. 많은 풍수가들은 양진당과 충효당은 그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명당이라는 주장을 하지만,맥로의 흐름과 추향(趨向)을 판단하면 그 우열은 단박에 알 수 있다.충효당은 면배의 배(背)에 해당하는 곳이다.‘서애종택’인 충효당은 류성룡 사후 문하생과 사림의 성금으로 지은 것으로 미수 허목(1595~1682년)이 쓴 ‘충효당’ 편액이 일품이다.

▲ 서애 류성룡의 증조부인 류자온 묘소(앞).배위 안동김씨 묘소(뒤). 안동 서후면 성곡리 소재.
▲ 서애 류성룡의 증조부인 류자온 묘소(앞).배위 안동김씨 묘소(뒤). 안동 서후면 성곡리 소재.
병산서원은 주변의 빼어난 경관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으며 배치했다는 점에서 건축적 원림적 사고의 탁월성을 보여주는 건물이라고 하다. 이곳의 백미는 단연 만대루 누각일 것이다.

풍산 류씨는 하회 입향조의 5세손인 류중영(柳柳仲: 1515~157)에 이르러서야 가문이 중흥하고 세상에 이름을 떨치게 되었을까?과문한 탓이나,필자는 우리나라에서 4대를 연속으로 대명당에 쓴 경우를 보지 못했다.그런데 풍산 류씨는 자온(子溫) →공작(公綽) →중영(柳仲) →운용(雲龍)·성룡(成龍) 4대를 모두 엄청난 대명당에 모셨다.

대명당 중에서도 류자온의 묘소가 압권이니,그 발음(發蔭)의 결실이 손자인 중영과 증손인 운룡·성룡으로 맺은 것이다.

류자온 묘소의 맥로는 남쪽으로 100여㎞ 떨어진 대구 팔공산 방향에서 출발해 좌선(左旋)하여 김천·구미간을 경유하고 계속 북진(北進)하여 경북도청을 지나 학가산 8부 능산 지점에서 다시 왼쪽으로 방향을 바꿔 묘역의 뒷산으로 낙맥한다.배위인 안동김씨의 맥로는 이와는 전혀 다른 북쪽의 봉화 명호면 풍낙산 방향에서 남서진(南西進)을 하여 묘역의 뒷산에서 두 맥로가 합쳤다 떨어지며 각기 결혈한다.

안동 서후면 성곡리에 소재한 류자온 묘소는 묘소로 들어가는 마지막의 입맥과정이 특이하니 묘역 백호방을 따라 내려오던 맥로가 묘소 앞에서 급반전을 하여 정확하게 결혈하였다.혈처의 역량은 삼신당 느티나무와 대등하고 또한 일본 토요타(豊田) 자동차 선영의 주혈(主穴)을 능가한다.

하회는 양진당,충효당,겸암정사,그리고 병산서원 등을 비롯하여 모두가 소중한 문화유산이다.그러나 양진당이 양택 명당이라서 큰 인물을 배출한 것은 아니다.양택이 명당이면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의 건강에 도움을 주기는 하지만 일의 성패와 결정적인 승부에는 크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양택은 풍수의 핵심인 동기감응(同氣感應)이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겸암과 서애와 같은 큰 인물이 배출되고,그들의 방명(芳名)이 오래 전해지는 것은 누대부터 명당에 모신 그들의 선영도 한몫했을 것이라는 필자의 판단이다.
▲ 손건웅(孫健雄) 풍수유람가    ·춘천고등학교·강원대학교 졸업    ·네이버카페 ‘동강의 풍수유람’ 운영    ·저서 ‘세상을 풍수로 보다’ 외 1권
손건웅(孫健雄) 풍수유람가
 ·춘천고등학교·강원대학교 졸업
 ·네이버카페 ‘동강의 풍수유람’ 운영
 ·저서 ‘세상을 풍수로 보다’ 외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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