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민체전부터 평창올림픽까지 성화봉송 ‘그랜드슬램’
1988년 서울올림픽 첫 성화봉송
국내외 5개 대형스포츠축제 주자
내년 평창올림픽 강릉구간도 선정
감사함 ‘촛불장학회’ 설립 보답도

서른살의 청년 박영봉은 ‘1988서울하계올림픽’ 성화 봉송 주자로 선발됐다는 통지문을 받았다.이날부터 며칠간은 가만히 있어도 배실배실 웃음이 흘러나왔다.그 후로 30년.60세의 박영봉은 ‘2018평창동계올림픽’ 성화봉송 주자로 선정됐다는 문자메시지를 받는다.벅찬 기쁨에 눈물까지 핑 돌았다.

1988년 봄날 아침.대학본부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지 3년 밖에 되지 않았던 서른살의 건장한 청년 박영봉은 우편정리 중 ‘1988서울하계올림픽’ 성화 봉송 주자로 선발됐다는 통지문을 받았다.몇달 전 시청에 붙어있는 ‘올림픽 성화 봉송 주자를 모집한다’는 공고문을 보고 지원서를 보낸 후 당락 소식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그는 복도 한복판에서 환호성을 지르고 말았다.이날부터 며칠간은 가만히 있어도 배실배실 웃음이 흘러나왔다.박영봉은 취미삼아 매일 나가던 신문배달도 전보다 더 열심히 뛰어다녔다.그 길이 마치 성화 봉송 구간인 것 같아 신이 났다.‘이렇게 폼나게 뛰어야지.’몸과 마음이 구름 위를 달렸다.그 후로 30년.희끗희끗한 새치가 머리 곳곳에 돋아난 60세의 박영봉은 ‘2018평창동계올림픽’ 성화봉송 주자로 선정됐다는 문자메시지를 받는다.‘성화봉송 주자로 선정되심을 축하드립니다.’너무나 가슴 졸이며 기다렸던 한 문장이 눈 앞에 보였다.벅찬 기쁨에 눈물까지 핑 돌았다.새로운 기록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1988년 서울올림픽 성화봉송때의 박영봉씨.
▲ 1988년 서울올림픽 성화봉송때의 박영봉씨.
박영봉(60) 가톨릭관동대 생활관장은 내년 동계올림픽을 가장 설레하며 기다리는 사람 중 하나이다.2018년 2월 8일 강릉 구간을 통과할 올림픽 성화 봉송을 들고 뛸 125명의 주자 명단에 그의 이름도 올라있기 때문이다.자국에서 열리는 올림픽 성화 주자로 나선다는 것은 어떤 이에게든 특별한 사건이겠지만 박 관장에게는 더욱 의미가 큰 일이다.그는 지난 1988년부터 국내에서 열린 5개 국내·외 대형 스포츠 축제의 성화 봉송 주자로 뛰어왔고 내년 동계올림픽 성화 봉송에 참여함으로써 ‘그랜드 슬램’을 이루게 된다.

강원도민체전(2003년)과 전국체전(2015년) 등 국내 메이저 대회와 평창 동계아시안게임(1999년), 인천 하계아시안게임(2014년) 등 대륙별 메이저 대회는 물론 세계 메이저 대회인 서울 하계올림픽(1988년)의 불꽃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쳐 경기장에서 불을 밝혔다.이제 남은 것은 평창 동계올림픽 성화 뿐이다.사실 그가 세운 기록은 세계적으로도 이례적이다.한 나라가 동·하계 메이저 스포츠 대회를 모두 유치하는 것이 쉽지 않을 뿐더러 지역에 성화 봉송 구간이 배당되지 않으면 주자로 뛸 수 없기 때문이다.또 높은 경쟁률을 뚫고 주자로 선정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 성화 봉송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박영봉 가톨릭관동대 생활관장이 1988년 서울올림픽 성화 봉송을 하면서 연도의 어린이·시민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성화 봉송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박영봉 가톨릭관동대 생활관장이 1988년 서울올림픽 성화 봉송을 하면서 연도의 어린이·시민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박 관장은 “모든 것에 감사하다”는 말로 소회를 피력했다.“우리나라 국력이 약했다면 이렇게 큰 대회들을 유치할 수 없었겠죠.사계절이 뚜렷한 것도 큰 장점이고요.또 성화 봉송자를 선정하는 기관에서 나를 뽑아주지 않았더라면 이런 기록을 세울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겁니다.무엇보다 내가 살아있는 시기에 모든 메이저 대회들이 연달아서 열리고 있으니 큰 행운이 겹치는 셈이죠.”

그는 그 ‘감사함’을 마음에 품고만 있지 않고 실천을 통해 더욱 빛나게 만드는 사람이기도 하다.

매년 장학금 지급,군장병·어린이 시설·복지기관·국가 유공자 위문,환경정화 활동 등 6가지 주제의 봉사를 통해 사회의 곳곳을 보듬는 일에 솔선수범이다.특히 그가 사재를 털어 지난 1989년,불과 31살의 나이에 설립한 ‘촛불 장학회’는 현재까지 2억여원의 장학금을 지급하기도 했다.

박 관장이 이처럼 사회 봉사에 열심을 쏟게 된 데에는 극적인 계기가 있었다.1976년 군에 입대한 그는 야간에 공중에서 낙하산을 메고 뛰어내리는 공수훈련을 하다 아찔한 사고를 당했다.이 사고로 허리와 무릎을 크게 다쳤지만 비관하지 않고 오히려 ‘죽을 목숨이었는데 천운으로 살게 됐으니 남은 생은 남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며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후 격렬한 스포츠를 할 수 없게 된 그는 건강을 위해 매일 신문배달을 하기 시작했고,이를 통해 얻은 수입을 모아 장학회를 세웠다.샐러리맨으로서 매년 봉사활동을 이어가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절약하고 모아서 또 도우려고 애쓰고 있다.

▲ 박영봉 가톨릭관동대 생활관장은 사재를 털어 ‘촛불장학회’를 설립,현재까지 장학 사업을 펼쳐오고 있다.
▲ 박영봉 가톨릭관동대 생활관장은 사재를 털어 ‘촛불장학회’를 설립,현재까지 장학 사업을 펼쳐오고 있다.
박 관장이 요즘 가장 관심을 쏟고 있는 뉴스는 ‘성화 봉송’이다.성화 봉송과 관련된 신문기사를 모두 스크랩하고 있다.그는 “지난 24일 박지성 선수가 성화를 넘겨받는 모습을 봤는데 마치 내가 뛰는 것 처럼 마음이 벅차고 설레더라”며 “내년 2월이 정말 기다려진다”고 말했다.

박 관장은 올림픽 후에도 성화 봉송 주자를 계속 신청할 예정이다.“혹시 누가 알겠습니까.강릉이 아시안 게임을 유치하게 될지요.건강이 허락하는 한 성화 봉송은 멈추지 않을겁니다.” 이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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