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민체전부터 평창올림픽까지 성화봉송 ‘그랜드슬램’
1988년 서울올림픽 첫 성화봉송
국내외 5개 대형스포츠축제 주자
내년 평창올림픽 강릉구간도 선정
감사함 ‘촛불장학회’ 설립 보답도
1988년 봄날 아침.대학본부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지 3년 밖에 되지 않았던 서른살의 건장한 청년 박영봉은 우편정리 중 ‘1988서울하계올림픽’ 성화 봉송 주자로 선발됐다는 통지문을 받았다.몇달 전 시청에 붙어있는 ‘올림픽 성화 봉송 주자를 모집한다’는 공고문을 보고 지원서를 보낸 후 당락 소식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그는 복도 한복판에서 환호성을 지르고 말았다.이날부터 며칠간은 가만히 있어도 배실배실 웃음이 흘러나왔다.박영봉은 취미삼아 매일 나가던 신문배달도 전보다 더 열심히 뛰어다녔다.그 길이 마치 성화 봉송 구간인 것 같아 신이 났다.‘이렇게 폼나게 뛰어야지.’몸과 마음이 구름 위를 달렸다.그 후로 30년.희끗희끗한 새치가 머리 곳곳에 돋아난 60세의 박영봉은 ‘2018평창동계올림픽’ 성화봉송 주자로 선정됐다는 문자메시지를 받는다.‘성화봉송 주자로 선정되심을 축하드립니다.’너무나 가슴 졸이며 기다렸던 한 문장이 눈 앞에 보였다.벅찬 기쁨에 눈물까지 핑 돌았다.새로운 기록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강원도민체전(2003년)과 전국체전(2015년) 등 국내 메이저 대회와 평창 동계아시안게임(1999년), 인천 하계아시안게임(2014년) 등 대륙별 메이저 대회는 물론 세계 메이저 대회인 서울 하계올림픽(1988년)의 불꽃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쳐 경기장에서 불을 밝혔다.이제 남은 것은 평창 동계올림픽 성화 뿐이다.사실 그가 세운 기록은 세계적으로도 이례적이다.한 나라가 동·하계 메이저 스포츠 대회를 모두 유치하는 것이 쉽지 않을 뿐더러 지역에 성화 봉송 구간이 배당되지 않으면 주자로 뛸 수 없기 때문이다.또 높은 경쟁률을 뚫고 주자로 선정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는 그 ‘감사함’을 마음에 품고만 있지 않고 실천을 통해 더욱 빛나게 만드는 사람이기도 하다.
매년 장학금 지급,군장병·어린이 시설·복지기관·국가 유공자 위문,환경정화 활동 등 6가지 주제의 봉사를 통해 사회의 곳곳을 보듬는 일에 솔선수범이다.특히 그가 사재를 털어 지난 1989년,불과 31살의 나이에 설립한 ‘촛불 장학회’는 현재까지 2억여원의 장학금을 지급하기도 했다.
그 후 격렬한 스포츠를 할 수 없게 된 그는 건강을 위해 매일 신문배달을 하기 시작했고,이를 통해 얻은 수입을 모아 장학회를 세웠다.샐러리맨으로서 매년 봉사활동을 이어가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절약하고 모아서 또 도우려고 애쓰고 있다.
박 관장은 올림픽 후에도 성화 봉송 주자를 계속 신청할 예정이다.“혹시 누가 알겠습니까.강릉이 아시안 게임을 유치하게 될지요.건강이 허락하는 한 성화 봉송은 멈추지 않을겁니다.” 이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