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역사 장류업계 선두 … 선영 대기업 추동 혈처 자리 영향
3곳 혈처 중 2곳 창업자·박승복 묘소
창업회장 부인 묘소 아들 관로 큰힘
60년대 산업화 사먹는간장 수요증가
불량간장 파동 속 소비자 신뢰 회복

▲ 남양주 진건읍에 소재한 샘표창업자 박규회 사장 묘소.
▲ 남양주 진건읍에 소재한 샘표창업자 박규회 사장 묘소.
‘보고는 몰라요.들어서도 몰라요.맛을 보고 맛을 아는 샘표간장’.CM송이 생소하던 시절인 1961년에 방송된 샘표의 CM송이 대히트를 치면서 샘표는 장유업계의 부동의 강자로 자리매김한다.당시 샘표간장의 CM송이 웬만한 유행가보다 더 많이 불렸으니,술집에서 조차 샘표의 CM송을 부르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샘표의 창업자 박규회는 함남 함주에서 월남해 학생복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해방이 되자 운영이 어렵게 된 삼시장유(三矢醬油)를 일본인이 매물로 내놓자,이를 인수하여 샘표간장을 창업한다(1946년).담가먹는 간장에서 사먹는 간장의 시대로 세태가 변하고 있음을 간파한 박규회의 안목이었다.

간장은 삼국시대부터 먹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우리 민족과 오랜 세월을 함께한 우리의 대표적인 발효식품이다.간장 맛이 없으면 그 해에는 큰 재해가 온다고 할 만큼 장 담그기는 모든 집의 모든 집안의 중요한 연중행사였다.소위 ‘왜간장’이란 조선간장과는 달리 콩과 밀로 만드는데,그 제조방법을 몰랐던 박규회는 시행착오를 거듭한다.또한 다량의 메주를 발효시키기 위한 온도를 맞추는 것도 수작업으로 해낸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수 많은 시험 끝에 마침내 대중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간장을 만드는데 성공을 한다.

‘간장은 담가먹는 것’이란 인식이 일반적인 시절에 ‘제조 간장’의 판매가 쉽지만은 않았다.간장병을 들고 가가호호 방문판매도 했지만 퇴짜맞기 일쑤였다.판매는 고사하고 간장의 맛을 알릴 기회조차 얻기 힘들었다.이런저런 어려움을 겪던 박규회는 ‘간장의 소비자는 주부’라는 점에 착안하여 당시로는 파격적인 주부사원을 채용했다.주부사원들은 소비자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었고,그 덕에 샘표간장은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고 창업 9년만인 1954년에 장유업계 1위에 오르게 된다.1960년대 본격적인 산업시대로 접어들자,그에 따라 농촌인구가 도시로 유입되면서 주거환경이 바뀌기 시작했다.마당과 장독대가 사라지는 것이었다.그 바람에 사먹는 간장의 수요가 늘고 간장제조 업체도 우수죽순 격으로 늘어났다.

샘표는 광고에서도 선제적이었다.1960년 마릴린 먼로를 연상시키는 영화배우를 캐스팅하여 샘표간장 댓병을 들고있는 신문광고를 냈다.1961년에는 샘표간장 CM송을 발표하니 사람들은 ‘간장은 샘표’라고 자동 연상할 정도가 되었다.박규회 사장이 샘표를 창업하여 기반을 닦은 것을 보면 함경도의 선영도 좋았을 것으로 추정된다.먼저 별세한 부인 강릉유씨의 묘소는 박승복의 관로에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묘소는 중견기업을 추동할 역량의 혈처에 자리한다.

박승복은 25년을 은행원으로 보낸 후 10여 년간은 공직생활을 했다.국무총리 행정조정실장으로 3명의 총리를 보좌하다가 1975년 12월 김종필 총리의 퇴진과 더불어 공직생활을 마감한다.퇴직 이듬해인 1976년 창업자인 부친이 별세하자 박승복은 샘표식품의 경영을 물려받는다.55세란 적지 않은 나이였다.박승복은 취임 첫날부터 만평이 넘는 창동공장을 하루에 2~3번씩 돌아보며 100일 동안 현장을 익혔다.구내식당에서 직원들과 함께하는 점심식사의 습관은 박회장이 34년간을 이어간 직원들과의 소통이기도 했다.종업원과 하나가 돼야 기업이 살 수 있다는 그의 소통방식은 샘표가 지금까지 노사분규가 발생치 않은 것으로 입증된 셈이다.

▲ 2016년 9월에 타계한 박승복 회장 부부 묘소.
▲ 2016년 9월에 타계한 박승복 회장 부부 묘소.
1970년 후반,열악한 환경에서 간장을 만드는 무허가 제조업체들이 증가하면서 간장에 대한 소비자들의 신뢰가 떨어졌다.이를 극복하기 위해 박승복은 간장제조 과정을 공개할 것을 제안한다.서로의 장점을 배우고 영세한 업체에게 기술을 전수하는 것이 대국적으로는 장유업계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업계와 사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제조과정뿐만 아니라 매출까지 공개하여 업계에 충격을 주기도 했다.

1985년 8월 무허가 업체에서 만든 불량간장 고발 뉴스가 보도되자 국민들은 경악했고 샘표도 그 여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사태가 심각해지자 박승복은 광고에 직접 출현하기로 한다.당시로는 회사대표가 광고에 출연한다는 자체가 파격이었다.제조과정 배경화면 앞에서 ‘샘표 가족 여러분 안심하고 쓰십시오.주부님들의 공장견학을 언제라도 환영합니다’라는 회사 대표의 코멘트는 소비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공장견학 주부들의 행렬이 이어지자,박승복은 직접 공장을 안내하며 제조과정을 일일히 설명하였다.짧은 시간 안에 소비자들의 신뢰를 회복하고 간장파동 이전보다 오히려 샘표의 매출이 증가하게 되었다.

1969년 3차 확장공사까지 했던 창동공장이 포화상태가 되면서 샘표는 새로운 공장을 짓기로 한다.1983년에 착공하여 1987년 1월 준공한 이천 공장은 자동화시설을 갖춘 국내 최대 규모의 장류공장이 되었다.박승복은 검소함으로도 유명했다.양복은 물론 사소한 용품들마저 10년을 넘겨쓰지 않은 것이 없었고 달력 뒷면과 이면지를 활용해 메모지로 사용했다.그는 자신이 타던 10년된 자동차를 장남인 박진선 사장에게 물려줬고 그는 이 차를 40만㎞를 운행하고서야 바꿨다는 일화가 전한다.

1997년 장남에게 회사의 경영을 넘기고 일선에 물러난다.그럼에도 일에 대한 그의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샘표식품이 2009년 내놓은 ‘백년동안’이란 히트 상품도 그의 열정이 만든 결실이었다.‘내 가족이 먹을 수 없는 것은 만들지 않는다’는 샘표 70년의 기업정신이 계속되길 기대한다.

박승복 회장부부 묘소의 맥로는 묘소 전방 좌측의 먼 속에 있는 오남저수지와 고추리골 사이에서 출발하여 진주아파트 단지를 감싸고 돌며서 산으로 거슬러 진행한다.묘역의 외청룡을 타고 올라온 맥은 묘역 뒷부분에 이르러 3개의 혈처를 배분한다.3개가 모두 샘표의 선영 내에 결혈하였으니,그 중에 2개의 혈처에 창업자와 박승복 회장을 모셨다.생전의 박승복 회장은 샘표를 장수기업이라 하면 “아직 100년도 못 됐는데…”라고 말했다.그리고 “성공했지요?”라고 물으면 “아직은 세계 일등이 아니다.일등을 해야 성공이지”라고 답했다.박회장의 묘소는 대기업을 추동할 혈처에 자리하니,앞으로 샘표는 백년기업,세계 일등 간장회사로 성장할 것이란 판단이다.
▲ 손건웅(孫健雄) 풍수유람가    ·춘천고등학교·강원대학교 졸업    ·네이버카페 ‘동강의 풍수유람’ 운영    ·저서 ‘세상을 풍수로 보다’ 외 1권
손건웅(孫健雄) 풍수유람가
 ·춘천고등학교·강원대학교 졸업
 ·네이버카페 ‘동강의 풍수유람’ 운영
·저서 ‘세상을 풍수로 보다’ 외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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