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가족화로 낯설게 느껴지는 촌수… 여전히 이모는 애틋한 호칭
질부·당숙·종고모 사라진 이름
실상에서 찾을 일 불편도 없어
신분·호칭 자유로운 사이버상
아이디로 위장 가능한 망명지
‘이름’에서 존재 빛나고 힘얻어

어쩌다 식당이거나 거리를 지나다 보면 세상의 이모나 삼촌,오빠,언니들은 다 그곳에 출동해 있다.이곳에서도 이모,저곳에서도 삼촌…이는 대처로 나갈수록 더 심해지는 것이어서 식당만이 아니고 옷가게,술집,치킨집,마트,오락실,빵가게,백화점,골목 등등에서 연호되고 있다.가끔은 저기요,여기요,사장님,어이,엄마 등이 잊혀진 회수권처럼 출몰하는 상황이다.그러고 보면 이름이야 촌스럽든 세련되든 짧든 길든 두껍든 얇든 거칠든 부드럽든 각자가 갖고 있는 팔자 같은 거라 공평하다는 느낌을 주지만,호칭은 그렇지 않다.호칭은 뒤에 있지만 어떤 반사광을 동반하기에 앞의 이름에 음영을 드리우는 개칠처럼 뒷끝이 맵기 마련이다.

일테면,조창배 회장님과 조창배 팀장님과 조씨아저씨 라는 호칭이 주는 차이는 종종 앞의 이름이거나 존재를 흔들어 대는 힘을 발휘한다.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격인데 오히려 앞의 이름보다 뒤의 호칭을 근사하게 만들기 위해 무진 애를 쓴다.그래서 사람들은 호칭을 빛나게 하기 위해 명함도 만들고 금박도 두르고,탁자 위의 명패도 또렷이 하고,벽과 방도 이에 걸맞게 삼엄하게 구획 된다.뷰와 공간의 크기도 당연히 이 호칭의 무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니 확실히 이름보다 호칭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런 호칭에다 우리네 전통을 더하자면 당장에 기쁨이 두 배이다.질부,당숙,종고모,내종질…지금은 드라마에서도 듣기 힘든 호칭이자 촌수들이다.주지하다시피 점차 핵가족화가 되면서 이런 호칭은 서로를 낯설고 난처하게 하는지 모른다.오죽하면 가족호칭과 관련된 패밀리 맵 어플이 나왔을 정도이다.그렇지만, 실상에서는 그것을 찾을 일도 없고 없어도 아무런 불편이 없다.민법에서는 친족을 배우자, 혈족 및 인척으로 규정하고 있다.조상부터 직선으로 계속하여 자기에게 이르는 사이의 혈족은 직계존속(父母, 曾祖父母, 高祖父母 등)이 되고 자기부터 직선으로 후예에 이르는 혈족은 직계비속(아들·딸·손자·증손 등)이 되는데 이 둘을 합쳐 직계존비속이라 한다.

이 직계존비속에 방계가 섞여들면 다양한 가족 간의 촌수와 호칭을 쓰게 되는데 이게 또 세계에서도 드물어서 촌수는 어엿하게 국립국어원에서 권장하고 있는 형편이지만 남편의 남동생과 여동생을 도련님,서방님,아가씨라고 부르는 데에 이르면 어쩐지 속이 불편하다.거기에는 전통의 이름으로 내려오는 완고함과 폭력성이 묻어있기 때문이다.이 촌수를 좀 거칠게 비유하자면,계급장과 같아서 어느 친척이 나와 어떤 상하관계,얼마쯤의 친소 거리에 있는지를 가늠하는 인식표와 같다.또한,가족 간의 명칭도 반상의 차별이 유난했던 조선조 가례에서 유래한 것이 많으니 당연 남성과 장자 위주로 정리된 조직표라는 혐의가 짙다.이처럼 우리는 인식하지 못하는 채 고래의 사회인식을 링거처럼 꽂아 살고 있지만 어쩌랴 여전히 이모는 이모,그립고 애틋한 호칭임에랴.

여기에 친절과 배려란 이름으로 실상은 점장의 눈총을 속이기 위해 말들은 무한 점프를 펼친다.‘고갱님, 표가 곧 나오실게요’.‘화장실은 오른편으로 돌아가실게요’.‘라떼는 아메리카노보다 이천원 더 비싸세요’.이른바 감정노동이라는 것인데 이상하게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존엄을 받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존칭을 쓰고 있지만,존경이 없는 말들,관계들,마음들.이런 호칭들 가운데 있다는 것은 대관절 어떤 것일까.그래서 우리는 신분도,호칭도 자유로운 사이버 상의 서식지를 좋아하는지 모른다.아이디만 있으면 누구로도,어디로도 위장 가능한 망명지가 있다는 것은 현실을 견디는 아까징끼,빨간 약 같은 것인지 실제로 사이버 세상은 점점으로 늘어나 항차 그 몸피를 예측조차 어렵게 된 상황이다.

그럼에도 왜 호칭이 사라진다고 하는 것일까.그것은 화려한 호칭과 촘촘한 촌수에도 불구하고 이름이 희미해지고,그 주인공인 존재가 비루해지고 있기 때문이다.누가 무엇을 불러주었을 때 꽃이 되는 것은 비단 꽃들만이 아닌 것이다.너를 불러주었을 때,나를 불러주었을 때,그 부름이 있어 한 세계가 온전히 이룩되는 것이다.그래서 이 땅의 작고 주변으로 밀려난 존재들은 그나마의 눈길과 손길과 입김으로 비로소 빛이 나고 힘을 얻는 것이다. 이럴 때의 호칭은 그야말로 서로에게 햇빛이 되고 물이 되고 악수가 되는 것이다.이렇게 세상은 일견 거창한 듯 보이지만 아주 작은 존재들이 모여 형상을 이루고 그 형상들이 모여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이처럼 기실 작고,기댈 데 없는 것들이 모여 서로 의지하고 바닥을 다지고,벽을 세우고,꿈을 만드는 것이다.

살다보면 심정이야 어떻든 받아들여야 될 일들이 있는 법이다.인구절벽이라는 말이 익숙해진 터에 핵가족화니 출산장려니 하는 말들은 억지가 되고 말 것이다.영원할 것처럼 늘어나던 인구가 그 관성을 멈추자 정작은 그동안 먹고 사는 문제에 안성맞춤으로 작동하던 혈연,학연,지연조차 걸림돌이 되는 각자도생의 혼란기를 맞고 있다.어차피 사회가 굴러가는 마당에 조직이 있고,지위가 있고,계급이 있겠지만 그 자리에 걸 맞는 비전도 없고,책임도 없고 존경도 없다.다만 사회는 어느새 기회를 잡은 자들만의 운동장이 되어 기존의 전통을 윽박지르는 것이어서 현실은 무한도전이기보다는 무한 구경이 된 터이다.

오늘도 주변으로 밀려나 세상의 온갖 길과 신호등에도 어찌할 수 없이 잉여에 봉착한 많은 사람들은 어두운 골목 같은 풍광 속에서 저물어간다.이제 세월이 더해 사람을 자유케 한다는 ICT 기술이 바코드나 숫자 몇 개로 취급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으니 천만 ‘아재’에라도 끼어 있음을 기꺼워해야 하는 것일까. 요는 누구라도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할 것인데 사람도 호칭도 배려도 한숨도 생의 가닥을 잡지 못한 채 중음신처럼 떠돌고 있다는 점이다. 어느 새 자본부군신위의 시대라 직계존비속조차 자본에 의해 재편되는 양상이니 이제 장차로 인류는 어떤 괴물을 양산하게 될 것일까. 그렇다면 과연 그것을 무어라 호칭해야 할 것인가.

(* 원고 중 이름은 특정인과 관계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최삼경

강원도청 대변인실 근무. 북한강생명포럼 이사
저서로 한국 소설 49편의 강원도 배경지를 여행하며 쓴 산문집 ‘헤이~ 강원도’가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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