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의 학자나 문필가들은 대개 아호를 지어 아호로 서로를 불렀다.아호가 좋은 점은 여럿 있겠지만 이름을 부르는 것보다 어딘가 품격이 있고 아호로 그 사람의 됨됨이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그러나 아호를 함부로 지어서는 안된다.특히 주의할 것은 유명한 분들이나 이해 관계가 있는 분들의 아호는 피해서 지어야 한다.이것도 일종의 ‘피휘(避諱)’에 해당한다.‘피휘’란 군주나 자신의 조상 이름에 쓰인 글자를 피하는 예전의 관습을 말한다.

작년 4월에 작고한 신봉승 씨는 강릉이 낳은 한국의 대표적인 작가이다.투철한 역사 의식,따뜻한 인간미까지 겸비하고 있어 이 지역이 자랑할 만한 문인이다.그러나 그의 호가 ‘초당’으로 잘못 알려져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잘 알다시피 ‘초당’은 허균과 허난설헌의 부친 허엽의 아호이다.허난설헌을 조선조 최대의 여류시인으로 평가하고 있는 신봉승 작가가 그녀 부친의 호를 자신도 동일하게 사용할 리가 없다. 그가 ‘피휘’를 모를 리 없는 것이다.

신봉승 작가의 아호는 ‘취영(翠影)’이다.풀이하자면 비취의 그림자, 즉 ‘초록 그림자’란 뜻이다.이것은 그의 수필 ‘초당동’에 나온다.‘초당,참으로 좋은 아호지만 불행하게도 나의 아호는 취영이다.그러나 초당동에 살고 있는데 무슨 유감이 있으랴’(신봉승 ‘내 인생 초록물 들이면서’,166쪽)가 그것이다.‘불행하게도’라는 단어에 ‘초당’이 허엽 선생의 아호여서 자신이 쓰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함축되어 있다.하지만 초록을 유난히 좋아하여 만년필 잉크도 초록색을 택한 분이기에 ‘취영’이란 아호가 무엇보다 걸맞다는 생각이다.앞으로 그의 추모 행사를 주관하는 이들은 ‘초당 신봉승’ 대신 ‘취영 신봉승’이라는 문구를 팸플릿이나 플래카드에 넣어주기를 당부한다. 박호영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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