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에서 명당이라 알려진 곳에 가족납골당 지어야”
중 시진핑, 부친 납골당 고향 이장
이후 당 총서기로 취임 경사 맞아
배우 고 김주혁·감독 고 김재형씨
가족납골당 위치 후손에 영향있어
우리나라 화장 장례 80%로 대세
10여년 전,S그룹의 회장이 영어(囹圄)의 신세가 되니 S그룹에 풍수자문을 해준 C교수에 대한 풍수계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그러자 K교수는 ‘화장하여 한 줌의 재만이 안치된 고(故) S그룹 회장의 무덤과 그 후손의 길흉관계를 이야기 하는 것은 이미 풍수 밖의 일이다’라며 C교수를 변명해 주었다.변명의 근거는 화장을 했으니 풍수의 본질인 동기감응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그러나 필자는 수 많은 현장을 통하여 화장하여 모셔도,그 발음의 영향은 매장(=생장)과 동일하게 작동함을 주장하였다.이런 주장의 보편성을 확인하기 위하여 화장문화의 선진국인 일본과 중국의 많은 납골묘도 간산하였다.
일본은 1876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 화장장례가 일반화되었다.초대에서 현재의 수상에 이르기까지의 역대 수상들의 선영과 100년이 넘게 지속 발전하는 일본 기업의 오너 선영을 간산하면서,납골풍수도 매장과 같이 동일한 풍수적 영향력이 존재함을 확인하였다.장기집권을 하고 있는 아베(安倍晋三)수상,일류기업인 도요타(豊田)자동차의 납골묘가 그 대표적인 증거라 할 수 있다.중국의 시진핑(習近平)과 보시라이(薄熙來)의 부친은 혁명원로로 생전에는 당내 위상도 대등했었다.그들이 별세하자 빠바오(八寶)산 혁명열사묘원(우리의 국립묘지에 해당)에 안치하였다.
그런데 시진핑은 부친 별세 3주기인 2005년 5월 부친의 납골항을 그의 고향으로 이장했다. 이후에 시진핑은 총서기가 되고 부모를 빠바오산에 그대로 안치한 보시라이는 수인(囚人)이 되는 극단적인 운명의 갈림도 납골풍수에 기인하는 실증이다.이제 우리나라도 매장이 아닌 화장(火葬)으로 장례를 치르는 비율이 80%를 넘어섰다.그리고 화장의 간편한 절차와 저렴한 비용 등으로 화장장례의 비율이 더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화장을 한 후,납골당에 모시는 것이 대부분이고 일부 문중과 가족들은 자신들만의 가족 납골당을 만들어 안치하는 경우도 적지않다.
2005년 4월 16일,김무생이 별세하였다.1년 후인 2006년 4월에 그의 부모님을 모셨던 서산 대로리에 가족 납골당을 만들어 조부모, 부모 그리고 김무생을 모셨다.그리고 2015년 김무생의 부인이 별세하자 또한 이곳에 모셨다.
전면에는 서해의 바닷물이 들어오는 뻘이 보이고 그 중간에는 웅도와 고파도가 자리한다. 그리고 바다의 허(虛)함을 막아주려는 듯 후방산에서 일지맥이 만대항까지 치고 올라가 수구(水口)의 초병(哨兵)처럼 자리하고 있다. 배산임수의 빼어난 풍광이 속사(俗士)의 안목을 속인 듯하다. 가족 납골묘는가 흉지에 자리한다. 부모나 조부모 중 한 분이라도 이런 곳에 모시면 어려움이 생기는데 여섯 분을 함께 모셨으니 후손이 그 불리한 기운을 어찌 감당할 수 있겠으랴.
김재형(1936~2011년)은 사극 드라마의 거장이었다. 그의 명작 ‘용(龍)의 눈물’에서 보여준 선 굵고 박진감 넘치는 장면들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눈앞에 선연하다.이 드라마를 통하여 유동근과 최명길은 스타 반열에 올랐고 김무생은 중견 배우로서의 유감없는 실력을 보여주었다.대본은 꼼꼼하게 챙기면서도 온 몸으로 쏟아내는 그의 연출지시는 연기자들의 열정보다 뜨거웠다.그의 비명(碑銘)에는 이런 말을 남겼다.‘내 소망은 연출하는 현장에서 큐를 외치다 쓰러지는 것이다’라고.
가족납골당은 많은 분을 함께 모시기 때문에 그 곳이 명당이면 모든 후손들에게 좋은 영향을 준다.그러나 흉지에 모셨을 경우에는 많은 후손들이 동시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가족납골당을 조성할 때는, 집안에서 명당이었다고 알려진 묘소에 납골당을 조성하는 것도 안전한 방법일 수 있다.화장이 대세인 지금, 전통풍수는 그 논리적 입지가 축소되었지만 위와 같은 사례에서 보듯이 납골당 풍수라는 새로운 분야는 오히려 그 중요성이 더해간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