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회공 구연호 묘소 ‘대명당’ 대기업 추동 역량 풍수적 뒷심
풍수파워 약화된 LG 구문 선영
사업 동반자 GS 허문 선영이 뒷받침
2005년 회사 분리 상보관계 사라져
능성 구씨 가족묘, 가문 최고 풍수
핵심 정혈 약간 벗어난점 아쉬워

우리나라의 저조한 출산율은 세계 최하위권으로 국가의 장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이런 현상은 자녀가 기업을 승계하는 업계에서도 드러나고 있다.상위에 랭크된 S,H 그룹의 경우,경영자에게 유고가 생기면 기업의 장래가 쉽게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이런 관점에서 맨파워가 충분하고 동기간의 인화가 좋은 구문(具門)의 LG그룹은 앞날이 가장 안정적일 것이란 생각이다.기업인 선영을 간산해 보면,기업의 흥망성쇠가 그들의 선영을 통하여 반영되는 풍수적 인과관계를 알 수 있다.그런데 LG의 풍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LG는 물론 상보적 동반자였던 GS의 허문(許門) 선영까지도 함께 보아야 LG의 전체적 윤곽을 파악할 수 있다.수 많은 양가(兩家) 선영을 간산하는데만 10여 년의 세월이 소요된 까닭이다.진주 지수면에 있는 LG의 오래된 조상과 만회공 묘소,부산 동래구에 있는 LG창업회장과 부모 묘소는 한 번을 간산하는 데만 800㎞에 달하는 여정이었다.여러 차례 간산을 반복하면서 LG의 구문(具門)은 누백년전부터 진주의 부호였음을 알 수 있었다.

지면상 만회공부터 구본무 회장에 이르는 직계 선영만을 언급하기로 한다.이해를 돕기위해 구문 5대의 성명을 기술하면,만회공(晩悔公) 구연호(具然鎬)-재서(再書)-인회(仁會)-자경(滋璟)-본무(本茂) 순이다.(구자경 이하는 생존).

▲ 만회공 구연호 묘소. 진주 청담리 소재.
▲ 만회공 구연호 묘소. 진주 청담리 소재.
만회공은 대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시독을 지냈다.그러나 조선말기,기울어가는 나라의 명운을 통감하고 낙향하여 후학들을 양성한다.손자(인회)가 태어나자 정득이라 이름 지으니,정미(丁未)년에 태어난 옥동자란 뜻이다.구인회는 6살 부터 유학자인 조부의 훈도를 받으며 성장하였으니,이것이 지금도 남아있는 LG가(家)의 유학(儒學)적 가풍(家風)이다.만회공은 생전에 손자에게 소중한 정신적 유산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사후에는 손자 구인회가 낙희와 금성사 (현 LG)의 창업이 가능토록 풍수적 뒷심이 되어주었다.

많은 풍수가들은 이 묘소가 후룡인 방어산에서 낙맥한다고 말하지만,그 보다 훨씬 먼 곳에서 출발한 맥로가 장원한 행도를 하고 방어산을 경유하여 묘소 뒤에서 급하게 떨어지며 산자락에 대명당을 결혈하였다.이곳에 자리한 만회공의 묘소는 대기업을 추동할 역량의 풍수파워를 지니고 있고 좌우의 부인 묘소도 중견기업 이상은 추동할 역량의 혈처이다.

▲ LG 창업자 구인회 묘소. 부산 온천동 소재.
▲ LG 창업자 구인회 묘소. 부산 온천동 소재.
구인회의 묘소는 흉에 걸렸고 부인 허여사의 묘소도 자리가 아니다.구회장은 회사를 창업하여 LG의 초석을 다졌지만 묘소는 흉지에 자리하여 후손에게 통한의 아픔을 초래했다는 풍수적 판단이다.그리고 상단에 자리한 부친(재서) 묘소는 소지소혈에 불과하다.1970년 경영을 승계한 구자경은 1995년 은퇴할 때까지 25년간 회장을 맡으면서 매년 높은 성장률로 회사를 반석에 올려놓았다.또한 1995년 이후,LG의 선장을 맡은 구본무 호는 여전히 순항하고 있다.이는 풍수적으로 납득이 안되는 대목이었다.왜냐하면 만회공 묘소의 풍수파워가 좋다하여도 증손인 구자경, 현손인 구본무 대에 이르면 그 풍수파워는 현저히 약해지고 구재서,구인회 양대의 묘소는 기업에 도움을 줄수 있는 풍수적 뒷심이 없기 때문이었다.

구문(具門)의 풍수파워가 약화되었음에도 LG호가 순항했던 것은 GS로 분리한 허문(許門)의 선영을 간산하면서 깨달았다.2005년 두 회사로 분리하기 전까지 LG의 깃발아래 두 가문은 사업의 동반자였다.즉,약화된 구문의 풍수파워를 허문의 선영이 뒷받침해 주었으니 그들은 사업뿐만 아니라 풍수에서도 상보(相補)적 관계였던 셈이다.2005년 양가(兩家)가 계열 분리를 하니 LG는 풍수적으로 기댈 곳이 없어졌다.그 시기에 구본무 모친인 하(河)여사가 별세한 것이다.

2008년 1월에 별세한 하정임 여사는 18세가 되던 해인 1942년 구자경과 결혼하여 시부모를 모시면서 6명의 자녀를 키우고 8명의 시동생을 보살폈다.그러면서 평생 기업인을 내조하였으니 그 삶의 무게는 일반인들이 짐작키 어렵다.그런데 사람들이 정작 놀란 것은 유풍(儒風)이 짙게 남아있는 LG가에서 ‘종부(宗婦)인 하(河)여사’를 화장(火葬)하여 납골로 모신다는 것이었다.어떤 풍수가들은 이제 LG의 앞날은 기대할 것이 없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필자가 누차 밝혔듯이 화장으로 모셔도 그 발음(발복)은 매장과 동일한 풍수적 영향을 주는 것이다.하여사를 모신 LG의 가족납골당을 찾아갔다.

▲ 능성구씨 가족묘. 이천시 해월리 소재.
▲ 능성구씨 가족묘. 이천시 해월리 소재.
능성구씨 가족묘의 맥로 출발 방위는 묘방(卯方:동쪽)이지만 그 출발점은 측량키 어려운 먼 곳이다.아득히 먼 곳에서 출발한 맥로는 270도를 환포하여 진입하는데 가까이로는 건지산을 경유한 맥로가 납골당을 포함하여 비교적 넓은 범위에 혈처를 맺었다.이 납골당의 풍수파워는 필자가 간산했던 LG가의 그 어떤 묘소보다 풍수파워가 좋은 곳이다.앞으로도 이곳에 후손들을 모신다면 세계적인 기업으로 지속 발전할 것이라는 판단이다.아쉬운 점은 일본의 도요타(豊田)를 능가하는 핵심 정혈에서는 약간 빗나간 점이다.명·청시대 수 백년간 중국 상단(商團)을 리드했던 유상(儒商)집단인 진상(晋商)과 휘상(徽商)을 능가하는 현대판 유상(儒商)의 모습을 LG에게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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