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당 묘소 대기업 주혈 능가 풍수파워 ‘3정승 6판서’ 배출
부친묘 3개월 구산끝 명당 백아곡 모셔
풍수자문·감평 후 조부묘 같은곳 이장
부모·삼남 묘소 중견기업 추동 대명당
택당 이식은 1610년(27세)에 문과에 급제한 뒤 관직을 지내던 중 (광해조)폐모론이 거론되자 지평(砥平;지금의 경기 양평군 양동면 쌍학리)으로 낙향하여 택풍당(澤風堂)을 짓고 학문에 전념했다.1623년 인조반정 이후 다시 출사하여 대제학 및 이조와 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척화를 주장하여,김상헌(金尙憲)등과 심양(瀋陽)에 끌려갔다 오기도 했다.조선의 유학자들은 주희(朱熹)의 영향으로 풍수에 적지 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다만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었다.택당 또한 풍수에 대한 관심은 예외가 아니였던 것으로 보인다.1613년, 부친이 별세하자 택당은 3개월이나 장사를 미루면서 구산(求山)하여 모신 곳이 백아곡이다.
필자도 수 많은 간산과정에서 조선시대 명풍으로 알려진 위 세 분의 소점지를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이의신은 광해조 때인 1612년 9월 한양은 지기(地氣)가 쇠했으니 교하로 천도하자는 상소를 올려 조정에 파란을 일으킨 인물이다.그가 상정했던 교하의 궁궐 예정 터 일대는 도처가 흉지일 뿐이다. 또한 고금의 역학과 제자백가에 통달했다는 박상의(1538~1621년)가 소점한 장성군에 있는 본인과 부모 묘소는 소지소혈에 불과하다.그리고 임란 때 원병(援兵)으로 왔다가 귀화한 두사충이 소점한 이인형과 이시백의 묘소도 소지소혈에 불과하다.택당의 백아곡 묘역은 그 주맥로가 원주 남부 방면에서 출발한다. 그 맥로는 장원한 행도를 거쳐 묘역 전면의 안산(案山)에 기운을 결집한다.그 집결처에서 3개의 맥로를 배분하니,하나는 택풍당 방향으로 진행하고 두 개의 맥로가 백아곡 묘역으로 진입한다.
주맥로는 택당의 묘소에 결혈하니,그 풍수파워는 삼성과 현대 선영의 주혈을 능가하는 풍수파워이다.택당의 아들(李端夏:이단하)과 손자(李?:이유)가 좌의정,영의정으로 현달하는데 결정적 뒷심이 됐다.택당 묘소의 여기(餘氣)가 포괄하는 섹터에는 부모님과 삼남의 묘소가 자리하는데 이 또한 중견기업 이상 추동할 역량의 대명당이다.한 지맥은 택당 장남 묘소에서 결혈하고 그 여기가 위로 거슬러 올라가 택당 조부 묘소에서 결혈하니 백아곡의 묘소는 모두 명당에 자리하고 있다.많은 풍수가들은 택당 가문에서 ‘3정승 6판서’를 배출한 것은 택당의 조부모 묘소 덕분이라고 말하지만 이 묘소는 소지소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