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당 묘소 대기업 주혈 능가 풍수파워 ‘3정승 6판서’ 배출
부친묘 3개월 구산끝 명당 백아곡 모셔
풍수자문·감평 후 조부묘 같은곳 이장
부모·삼남 묘소 중견기업 추동 대명당

조선시대 덕수이문(德水李門)은 율곡 이이(李珥,1536 ~ 1584년)와 충무공 이순신(1545~ 1598년)을 배출함으로써 천하에 명망을 떨쳤다.두 사람은 19촌 숙질간이었다.두 분 못지 않게 덕수 이문을 빛낸 이가 있으니 바로 택당(澤堂) 이식(李植,1584∼1647)이다.그의 조부 이섭(李涉)은 율곡과는 8촌간이니 한 집안인 셈이다.문형(文衡)이란 학문을 평가하는 저울이란 뜻으로 대제학의 별칭으로,이는 학문과 도덕을 겸비한 선비만이 가능한 자리였으니 정승(政丞)보다 더 명예롭게 생각하였다(三政丞不如一大提學).그런 대제학을 택당과 그의 아들,손자 3대에 걸쳐 지냈으니 조선시대 명문가로서의 확실한 자리매김을 한 셈이다.

택당 이식은 1610년(27세)에 문과에 급제한 뒤 관직을 지내던 중 (광해조)폐모론이 거론되자 지평(砥平;지금의 경기 양평군 양동면 쌍학리)으로 낙향하여 택풍당(澤風堂)을 짓고 학문에 전념했다.1623년 인조반정 이후 다시 출사하여 대제학 및 이조와 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척화를 주장하여,김상헌(金尙憲)등과 심양(瀋陽)에 끌려갔다 오기도 했다.조선의 유학자들은 주희(朱熹)의 영향으로 풍수에 적지 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다만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었다.택당 또한 풍수에 대한 관심은 예외가 아니였던 것으로 보인다.1613년, 부친이 별세하자 택당은 3개월이나 장사를 미루면서 구산(求山)하여 모신 곳이 백아곡이다.

▲ 백아곡 택당 묘역. 택당 묘소를 기준하여  1조부모  2부모님  3택당  4장남 이면하  5삼남 이단하.
▲ 백아곡 택당 묘역. 택당 묘소를 기준하여 1조부모 2부모님 3택당 4장남 이면하 5삼남 이단하.
또한 1615년에는 전라도 고장(古阜)에 있던 조부 섭(涉)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한다.택당은 조부의 묘를 이장(移葬)할 때는 당대의 명풍 이의신의 도움을 받았고 박상의(1538~1621년)와 두사충에게 풍수자문과 감평을 받기도 한다.그렇지만 당대 명풍들이 택당의 조부 묘소를 두고 벌였다는 와겸유돌(窩鉗乳突)의 혈상(穴象)논쟁은 그들의 성가(聲價)에 못미치는 수준을 드러냈을 뿐이다.판관의 실력은 판결문에 드러나듯이,풍수가의 실력은 그가 소점한 곳을 통하여 드러난다.

필자도 수 많은 간산과정에서 조선시대 명풍으로 알려진 위 세 분의 소점지를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이의신은 광해조 때인 1612년 9월 한양은 지기(地氣)가 쇠했으니 교하로 천도하자는 상소를 올려 조정에 파란을 일으킨 인물이다.그가 상정했던 교하의 궁궐 예정 터 일대는 도처가 흉지일 뿐이다. 또한 고금의 역학과 제자백가에 통달했다는 박상의(1538~1621년)가 소점한 장성군에 있는 본인과 부모 묘소는 소지소혈에 불과하다.그리고 임란 때 원병(援兵)으로 왔다가 귀화한 두사충이 소점한 이인형과 이시백의 묘소도 소지소혈에 불과하다.택당의 백아곡 묘역은 그 주맥로가 원주 남부 방면에서 출발한다. 그 맥로는 장원한 행도를 거쳐 묘역 전면의 안산(案山)에 기운을 결집한다.그 집결처에서 3개의 맥로를 배분하니,하나는 택풍당 방향으로 진행하고 두 개의 맥로가 백아곡 묘역으로 진입한다.

주맥로는 택당의 묘소에 결혈하니,그 풍수파워는 삼성과 현대 선영의 주혈을 능가하는 풍수파워이다.택당의 아들(李端夏:이단하)과 손자(李?:이유)가 좌의정,영의정으로 현달하는데 결정적 뒷심이 됐다.택당 묘소의 여기(餘氣)가 포괄하는 섹터에는 부모님과 삼남의 묘소가 자리하는데 이 또한 중견기업 이상 추동할 역량의 대명당이다.한 지맥은 택당 장남 묘소에서 결혈하고 그 여기가 위로 거슬러 올라가 택당 조부 묘소에서 결혈하니 백아곡의 묘소는 모두 명당에 자리하고 있다.많은 풍수가들은 택당 가문에서 ‘3정승 6판서’를 배출한 것은 택당의 조부모 묘소 덕분이라고 말하지만 이 묘소는 소지소혈이다.

▲ 택당 묘소 후경. 양평군 양동면 쌍학리 소재. 오른 쪽에는 부모님과 삼남의 묘소가 자리한다.
▲ 택당 묘소 후경. 양평군 양동면 쌍학리 소재. 오른 쪽에는 부모님과 삼남의 묘소가 자리한다.
택당 묘소는 오래 전부터 명당이냐 아니냐의 논란이 그치지 않았다.묘소는 움푹 들어간 곳에 있으니 풍수 초보자들은 자리가 아니라고 말하고 법안(法眼)의 경지에 이른 자들은 와중지돌(窩中之突)로 자리가 되었다고 한다.그러나 이런 엄청난 대명당에는 와겸유돌의 사상논쟁은 무의미한 곳이다.쌍학리의 택당 묘역을 나와 양동면 사무소 우측에 있는 목골 안쪽으로 들어가면 택당의 둘째 아들 이신하의 묘소(석곡리)가 있는데 이 묘소도 대명당에 자리한다.다시 양동면 사무소에서 남쪽으로 1.5㎞ 내려와서 영서북로를 따라 북쪽으로 4킬로 정도 지나면 우측에 산숫골 마을을 만나게 된다.마을 맞은 편이 덕수 이문의 종중 산으로 마침 묘역을 관리하는 후손을 만나 묘소를 안내받았다.

▲ 양평군 양동면 계정리에 소재한 영의정 이유 묘소.
▲ 양평군 양동면 계정리에 소재한 영의정 이유 묘소.
이유(1645~1718년)는 택당의 둘째 아들인 이신하(李紳夏)의 아들이다.1662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20년 뒤에는 강원도 암행어사를 지냈으며 1685년에는 승지로 발탁,대제학에 올라 대사성을 겸했다.그리고 1702년에는 좌의정과 영의정을 역임했다.이유 묘소의 맥로는 남쪽의 관위산 방면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묘역에서는 청룡방을 경유한 맥로가 묘소 앞서 급전(急轉) 상향(上向)하여 정확하게 대명당으로 결혈하였다.요즘 기준 대기업 오너의 선영과 대등한 역량이다.맥로의 흐름은 높은 산에서 낮은 산으로 흐른다는 일반적인 풍수이론이 맞지 않음을 보여주는 묘역이다.
▲ 손건웅(孫健雄) 풍수유람가    ·춘천고등학교·강원대학교 졸업    ·네이버카페 ‘동강의 풍수유람’ 운영    ·저서 ‘세상을 풍수로 보다’ 외 1권
손건웅(孫健雄) 풍수유람가
 ·춘천고등학교·강원대학교 졸업
 ·네이버카페 ‘동강의 풍수유람’ 운영
 ·저서 ‘세상을 풍수로 보다’ 외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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