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술 매력에 푹 빠지면 그렇게 힘들어도 펜 놓지 못해요”
20대때 의지·열정 고스란히 담아
여성의 삶·몸·정체성 등 녹여내
컬렉션에 옛 작품들 큰수정 없어
40년 동안 춘천서 집필 활동
문학 배경 지역 이미지 반영
앞으론 연애소설 써보고 싶어

오정희 소설가

대담=김미월 작가 ·김유정백일장 장원 수상

▲ 올해로 등단 50주년을 맞은 오정희(사진 오른쪽) 소설가가 최근 춘천의 한 카페에서 후배 작가인 김미월 소설가와 만나 대담을 나눴다. 김명준
▲ 올해로 등단 50주년을 맞은 오정희(사진 오른쪽) 소설가가 최근 춘천의 한 카페에서 후배 작가인 김미월 소설가와 만나 대담을 나눴다. 김명준
“글로 인해 괴로워하면서도 행복하고 고마운 세월이었어요.” 문학 인생 50년.그녀는 여전히 문학소녀처럼 순수하다.196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공모에서 단편 ‘완구점 여인’으로 등단한 이래 반세기 동안 ‘글쓰기’를 업으로 삼아 온 소설가 오정희(71).‘작가들의 작가’ ‘단편 미학의 정점’ ‘한국 여성문학의 원류’라고 불리며 한국 문단에서 한 획을 긋고 있는 오 작가를 제1회 김유정백일장(1993년) 장원 수상자이자 춘천출신 작가 김미월이 만났다.김 작가는 지난 2004년 우연히 오정희 작가가 심사한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인연을 갖고 있다.‘춘천’과 ‘여성’,그리고 ‘소설가’라는 공통분모로 4시간이 넘게 이어진 후배와의 대화에서 오정희 소설가는 최근 등단 50주년을 맞아 출간한 ‘오정희 컬렉션’(문학과지성사)부터 지난 50년간 이어진 글쓰기의 삶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 오정희 컬렉션
▲ 오정희 컬렉션
■ 등단 50주년과 오정희 컬렉션

△김미월(김)=“등단 50주년과 오정희 컬렉션 출간을 축하드립니다.50년을 한결같이 글을 써오신 선배님들을 항상 우러러보게 되고 작가로서 닮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과거는 물론 지금 등단하는 신인 작가들도 선생님 작품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말하는데 그건 정말 특별하고 대단한 일입니다.”

△오정희(오)=“반세기라고 하니까 엄청나 보이지만 금방 갔던 것 같아요.사실 햇수에 비해서는 작품 수가 적고 열심히 못했다는 자괴감이 있어요.50주년이라고 출판사 측에서 지난 작품을 정리한 컬렉션을 출간했는데 해놓고 나니 하나의 매듭을 진 것 같아서 앞으로 한 걸음 더 내디딜 용기를 갖게 된 것 같아요.”



△김=“대학생 때 ‘불꽃놀이’를 처음 읽고 난 후 ‘이런 감정을 이런 문체로 이렇게 묘사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큰 충격을 받았어요.‘완구점 여인’을 읽고 나서도 기존에 갖고 있던 완구점에 대한 이미지를 다 버리게 됐을 정도였죠.이번 컬렉션을 내시면서 특히 눈길이 갔던 작품이 있으셨나요?”

△오=“원래 지난 작품을 잘 보는 편은 아닌데 이번에 작품을 쭉 다시 읽으니 ‘새’는 참 열심히 썼구나,좋았다 싶었어요.성과를 떠나 얼마나 절실하게 진정성을 갖고 썼는가가 느껴지면 작품을 아끼는 마음을 갖게 되는데 20대 때 쓴 ‘불의 강’도 지금 보면 서툰 부분이나 불필요한 수식이 보여 민망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20대 때 제 모습,글에 대한 의지와 열정 같은 게 역력하게 나타나서 미소도 지어져요.마치 내 청춘의 자화상 같기도 하고,‘다시 태어나서 작가가 돼도 역시 또 이런 식으로 쓸 수밖에 없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그래서 이번 컬렉션에는 옛 작품도 큰 수정 없이 실었어요.”



■ 여성문학 그리고 여성작가

△김=“선생님 작품을 보면 항상 여성의 삶과 몸,정체성과 같은 것들을 이렇게 묘사하고 이렇게 표현할 수 있구나 하는 감탄을 하게 됩니다.여성의 이야기를 하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오=“여성은 구조적으로 굉장히 내밀하기도 하고 그동안 사회적 규제라던가 인습,교육적인 부분에서 안으로 감춰져 있던 존재였죠.그래도 이제는 많이 달라지고 있는 것 같아요.저는 작품세계가 넓지도 못하고 견문이 좁은 편이라 저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데 집중한 것 같아요.사실 기이한 사고를 겪거나 색다른 풍경을 본다 해도 그것이 글로 형상화되려면 상당한 체화의 시간이 필요하잖아요.외부적인 자극과 충격이 내 안에 들어와 오랜 세월을 두고 녹아 작품으로 빚어진 게 아닌가 싶어요.”



△김=“개인적으로 최근 출산과 육아를 하게 되면서 작품활동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어요.과거에는 사회적 분위기도 지금과 많이 달라 여성작가로서 훨씬 어려움이 컸을텐데 어떻게 그렇게 내면의 곡진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여성작가가 결혼과 출산을 통해 삶의 궤도를 수정하거나 생활 속에 매몰되면서 일시적인 공백을 갖거나 작품세계의 변화를 겪을 수 있지만 문학은 항상 일상적 요구와 창작적 욕구가 부딪치고 갈등하는 것인 만큼 그것과 싸우는 게 문학이라는 생각도 들어요.일단 작가는 여성으로 출발해서 내 몸과 사유에 대해 이야기할 수는 있지만 여성보다는 인간으로 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 춘천에서의 삶과 창작

△김=“40년 동안 춘천에서 집필활동을 하셨죠.춘천 이주하고 나서 쓰신 작품부터는 춘천이 느껴지는 배경의 작품이 많은 것 같아요.활동 공간이 작품에 영향을 많이 미치는 편인가요?”

△오=“그런 것 같아요.이곳이 지난 40년간 내 삶과 사고의 반경이기 때문에 작품의 배경을 떠올리고 어떠한 장치를 할 때 춘천의 이미지가 반영될 수밖에 없죠.하지만 그래도 마냥 안주하거나 익숙해지지 않고 작가로서의 의식을 가지려고 해요.기질적으로 많이 돌아다니지 못하는 편이다 보니 내 집과 공간,세상,그리고 나 자신과의 거리 두기에 신경을 쓰죠.”



△김=“독자로서 소설을 읽었을 때는 작가가 직접 겪은 일인가 싶을 정도로 심리 묘사가 생생하게 느껴져서 발칙한 상상도 했던 것 같아요.그런 의도치 않은 오해를 받으신 적이 있나요? 작가로서 고비가 찾아오신 때는 언제인지도 궁금합니다.”

△오=“작품 세계가 좁은 편이고 가족 이야기가 이어지다 보니 소설 속 이야기를 실제 나와 가족의 이야기로 투영해서 보는 분들도 있었어요.‘유년의 뜰’이나 ‘중국인 거리’의 경우 제 가정환경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 보니 제 주변 사람들이 오해를 받기도 했죠(웃음).작가로서는 항상 고비고 항상 위기였던 것 같아요.결국 글을 한 편 완성한다는 것은 자기 검열에서 살아남는 거예요.매번 좋은 작품만을 쓸 수도 없는 노릇이니 끊임없이 자신을 구박하고 학대해야 했고 젊을 때는 재능에 대한 회의나 심한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어요.하지만 예술의 매력에 매료되면 그렇게 힘들어도 놓기가 쉽지 않은 것 같아요.작가가 일생의 직업이라고 생각한다면 밥 먹는 것처럼 계속 쓰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 50년 그리고 그 후

△김=“지금 준비하고 있는 작품이나 앞으로 집필하고 싶은 작품이 있으신가요? 글은 주로 언제 쓰시나요?”

△오=“돌아가신 부모님이 살아왔던 그 시대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어요.연애소설을 잘 써야 진짜 작가라는 말이 있는데(웃음) 넓은 의미에서의 연애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도 해요.일부 작가는 밤새워 글을 쓴다고 하는데 저는 일과시간이 오히려 편해요.”

△김=“선생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 개인적으로는 많이 부끄럽기도 했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계기도 된 것 같아요.만약 다시 태어나신다면 그때도 작가라는 직업을 선택하실 건가요.”

△오=“정말 좋은 작가가 되고 싶다,더 잘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으니까 아마 또 작가가 하고 싶지 않을까 싶어요.지금 생각하면 글을 쓴다는 건 다른 욕망에 흔들리지 않고 오로지 글을 쓰겠다는 욕망 하나로만 살 수 있는 삶의 안전망 같은 것 같아요.세속적인 것과 분리돼 인간적인 가치관이 너무 낮아지지 않게 나를 보호한 장치로 작용했다고 할까.또 글을 쓰고 읽는다는 것은 내 영혼이 아직 보지 못했던 어떤 것들을 보게 하며 비로소 사유가 선명해지는 것,진정한 가치와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계속 생각하는 일이었던 것 같아요.그런 면에서 성취 여부를 떠나 그렇게 살아온 세월은 참 좋았던 것 같아요.” 정리/최유란

1947년 서울 출생으로 이화여고,서라벌예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196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완구점 여인’이 당선돼 등단한 후 작품집 ‘불의 강’(1977),‘유년의 뜰’(1981),‘불꽃놀이’(1995),장편소설 ‘새’(1996) 등을 통해 한국 여성문학의 원류로 자리 잡았다.이상문학상(1979),동인문학상(1982),동서문학상(1996),오영수문학상(1996) 등을 수상했으며 2003년에는 독일에서 번역 출간된 ‘새’로 리베라투르상을 수상,한국인 최초로 해외에서 문학상을 받은 주인공으로 기록됐다.1978년 남편인 박용수 전 강원대 총장과 함께 춘천에 정착해 집필활동을 하고 있으며 지난 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직무대행을 맡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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