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광 식 논설위원

국제 결혼을 한 중국인과 미국인의 3대에 걸친 가족의 이산과 인종적 갈등을 섬세하게 펼쳐 보인 미국의 여류 작가 펄벅의 소설 '북경에서 온 편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녀의 문학성이 노벨 문학상을 받을 만큼 위대하냐의 문제를 다루려는 것도 아니다. '북경에서 온 편지'는 6·25 직후 사랑하는 사람이 남북으로 헤어져 고통 받는 한반도 현실에서 한 때 적지 않은 감동을 주었지만, 세월이 흐른 오늘 소설의 감동은 바래고 말년에 '펄벅 재단'을 설립해 전쟁 중 미군으로 인해 태어난 사생아 입양 알선 사업을 벌리면서 한국을 방문하기도 한 우리들의 친애하는 펄벅 여사는 가엽게도 오늘의 한국 청춘들에게 관심의 중심도 대상도 이미 아니게 됐다.
 그럼에도 울컥 그리고 갑자기 여사의 소설 '북경에서 온 편지'를 떠올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편지를 띄우듯 그립고도 기이한, 심상찮고도 우울한 몇 가지 소식이 연일 북경으로부터 날아들기 때문이다. 제1신은 경원하 박사의 이야기다. 며칠 전 북한의 핵 관련 전문가 경원하 박사가 지난 해 말 북한을 빠져나와 현재 미국에 체류 중이라고 북한 내부 움직임에 정통한 북경의 한 소식통이 밝혔다. 그 이후 춘천에선 경 박사 일화를 중심으로 이야기 밤을 지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강원대학교의 전신인 춘천농대 강사로 호리호리했던 그가 얼마나 수학을 잘 가르쳤고, 특히 김일성종합대학을 나온 전력을 극복하고 시대와 사회에 인정받으려는 욕망이 얼마나 가슴 속에 들끓었으며, 이루어질 가망이 없자 어떻게 좌절했으며, 언제 브라질로 건너갔고, 어찌하여 캐나다 몬트리올로 옮기고, 그리하여 종당엔 왜 북으로 가 버렸는지에 대해 사실과 추측을 넘나드는 전설 같은 얘기들이 떠도는 중이다.
 헤어져 반세기가 다 돼 가는 오늘 이런 이야기들을 주고받는 경 박사의 옛 동료와 제자와 지인들의 가슴 저 아래쪽 정서는 매우 '똑똑했던' 그를 새삼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절정은 젊은 학자 경원하가 이 땅에 뿌리를 못 내리게 만든 이쪽 사회의 폐쇄성과 배타성 대목을 아쉬워하는 부분이다. 예전이나 이제나 우리들의 속 좁음에 이르러 그저 막막함을 느낄 따름이다.
 제2신으론, '북경에서 온 편지' 아니, 북경에서 날아온 수상한 소식이 연일 신경을 긁고 있다. 다시 옛 얘기로 돌아가 보자. 때는 1971년 10월 22일 북경의 인민대회당이었다. 거기서 당시 세계를 주무른 유명한 외교 전략가인 미국의 키신저와 중국의 주은래가 바야흐로 한반도를 요리하기 시작한다. "정리해 봅시다. 남조선에서 미군이 철수하기 전에 한국군이 북침하지 않도록 하겠다 하셨죠?" 주은래의 다짐에 키신저는 이를테면 '맞습니다, 맞고요'식으로 당시 정황상 있을 수 없는 약속을 해 버린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은 유엔을 비롯해 국제 사회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의 법적 지위를 인정하겠습니다." '백악관 1 급 비밀'이었다가 30 년만에 해제된 '키신저-주은래 대화록'의 내용 일부다. 한 세대가 지난 지금 북경에서 또 다시 한반도 문제의 배타적 이익을 잃지 않으려고 한국을 빼고 북한은 끼고 중국과 미국이 머리를 짜고 있다. 이 북경발 근착 소식에 그저 막막할 따름이다.
 제3신은 사스(SARS)다. 지금 북경에서 수십 명의 사망자를 낸 사스가 인천국제공항으로 몰려든다. 대한민국을 제외한 세계 전역에서, 아니 최근 며칠 국내에서도 유사 사스 환자가 발견됐다. 외국 언론이 마늘과 김치 효과를 요란하게 떠들어댄 바람에 차마 발표할 수 없어 쉬쉬하는지 모르나 '유사' 사스 환자가 아니라 '거의' 사스 환자가 여러 명 생긴 모양이다. 심각한 문제는 이 변종 바이러스를 퇴치할 백신 개발이 어려워 속수무책이라는 점이다. 다시 호모 사피엔스 코리아나는 그저 막막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1938년 펄벅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수상작은 '대지(大地·The Good Earth)'였다. 빈농으로부터 입신하여 중국 큰 땅의 대지주가 되는 왕용(王龍)을 중심으로 가족사를 그린 장편소설이다. 중국은 왕용처럼 아무래도 대국을 꿈구는 미국과 함께 제국주의로 가는 것 같다. 보이지 않는 경 박사를 그리워하며, 북경에서 날아온 사스에 떨며, 끼지도 못하고 북경의 다자회담을 답답하게 바라보기만 하는 우리는 이 시간 그저 끝 없이 막막함을 느낄 따름이다.
 이광식 논설위원 misan@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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