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많은 생명 살리고 ‘ 백세장수’ 모친묘 풍수 영향
두살때 부친 잃고 19세 최연소 의사 합격
갓난아이 치료 위해 두유 개발 뛰어들어
1973년 정·식품 창업 지난해 101세 별세
모친 묘소 대기업 추동 역량 혈처 자리

▲ 정재원 회장 모친 묘소
물을 많이 마시는 체질이라 물병을 가지고 다지지만,요즘같은 날씨에는 이것이 여의치 않다.편의점에 들러 ‘정·식품 베지밀’ 한 병을 마시면 갈증해소에 딱이다.따뜻한 베지밀 한병에는 정재원의 인술이 담겨있다.

1917년 황해도 은율의 산골에서 태어난 정재원은 두 살 때 부친을 여의였다.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목욕탕 청소부,모자가게 사환 등 힘겨운 삶을 시작했다.15살 되던 해에 평양 의학강습소 사환으로 취업했다.강의실 청소와 허드렛일을 하며 학생들의 의학교재를 등사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책이 귀해 등사기로 교재를 찍어내던 시절이었다.사환생활이 익숙해지자 등사한 교재가 그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공부를 좋아했던 정재원은 등사한 교재를 사전을 뒤져가며 읽기 시작했다.하루에 한 장을 겨우 읽을 수 있던 것이 나중에는 50장까지 읽을 수 있게 되었다.17살이 되던 봄,의사고시에 응시할 생각으로 2년간을 주경야독한다.그의 나이 19살에 최연소로 의사고사에 합격한다.

1936년,성모병원에서 의사생활을 하던 때였다.아주머니가 갓난 아이를 업고 왔는데 아이는 일주일간 설사만 하다 사망한다.밤낮으로 아이를 치료했던 정재원은 큰 충격을 받는다.설사와 구토,복부팽만 등의 원인 모르는 질병으로 갓난 아이들이 많이 죽어가던 때였다.그는 설사병으로 사망한 어린 생명의 모습을 단 하루도 잊을 수가 없었다.설사병의 원인을 찾으려고 20년을 매달렸지만 치료방법은 커녕 병명조차 알 수 없었다.

▲ 정재원 회장 모친 묘소(사진 위).용인 천주교회 묘원.1952년 제주 사라봉에 모셨다가 1976년에 이곳으로 이장했다.정재원 회장 모친 묘소 후경(아래).그 뒤의 원형 봉분이 정회장 부부묘소.
▲ 정재원 회장 모친 묘소(사진 위).용인 천주교회 묘원.1952년 제주 사라봉에 모셨다가 1976년에 이곳으로 이장했다.정재원 회장 모친 묘소 후경(아래).그 뒤의 원형 봉분이 정회장 부부묘소.


정재원은 40세가 지나자 명의로 소문이 나서 찾아오는 환자가 많아졌다.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왔다.그러나 설사병을 고쳐야겠다는 생각으로 병원 문을 닫고 영국 유학을 결심한다.1960년,43세의 정재원은 런던대학교 소아과 대학원생이 되었다.6개월을 예정한 유학이 3년을 넘겼지만,영국에서도 해답을 찾지못했다.여기서 포기할 정재원이 아니었다.1964년,미국 샌프란시스코의 UC메디컬 센터를 찾아갔다.도서관에서 수 많은 텍스트와 씨름하던 중,마침내 비밀의 열쇠를 찾았다.‘乳糖不耐症’(lactose intolerance)이라는 논문이었다.20여 년간의 의문이 풀리기 시작했다.유당이 없는 유액이 뭘까.어린 시절 어머니가 끊여줬던 콩국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콩에는 단백질,탄수화물,지방 등의 다량의 영양소가 있지만 유당은 없는 식품이었다.1965년부터 정재원은 두유개발을 시작했다.낮에는 병원에서 진료를 하고 밤이 되면 지하에서 연구와 실험에 몰두했다.실험용 쥐를 사용하니 동네에 쥐가 들끓는다는 민원이 들어왔고 주변에서는 정원장이 이상해졌다고 수근거렸다.1967년,3년간의 연구 끝에 두유개발에 성공한다.불치의 진단을 받은 갓난 환자가 찾아왔다.눈도 못뜨고 갸냘픈 숨만 내쉬는 아이에게 입을 벌리고 두유를 한 방울 두 방울씩 투입했다.그렇게 몇 번을 하니 아이가 눈을 뜨고 꿈틀거렸고 사흘이 지나자 정상적으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이 때가 내 인생에 가장 기뻤던 순간이었다”고 정재원은 회고했다.

설사병을 앓는 아이의 부모들 사이에는 ‘정소아과가 용하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환자가 몰려들자 두유공급에 문제가 생겼다.많은 신생아 환자를 살리기 위해서는 창업말고는 다른 길이 없었다.1973년,정재원이 56세의 나이에 ‘정·식품’을 창업한 이유이다.공장설비는 일본 기술자들의 도움을 받았지만,두유의 장기 보관이 문제였다.정재원은 고압소독이란 방법을 생각해 냈고 수 많은 실험을 통해 두유가 변질되지 않는 고압소독 시간을 찾아냈다.마침내 신갈공장에서 식물(vegetable)과 우유(milk)의 합성어인 ‘베지밀’을 하루에 20만 병씩 생산하기 시작했다.베지밀은 두유음료의 베스트 셀러가 되면서 수요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1984년에는 청주에 세계 최대 규모의 시설을 갖춘 공장을 준공하여 하루 150만병을 공급하게 되었다.

정회장은 평생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의사이자 실험가였다.제품의 맛보다는 영양을 중시한 기업인이었다.90을 넘어서도 영어공부로 하루를 시작하고는 했다.2004년,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결혼식 때 입었던 턱시도를 꺼내입고 조문객을 맞이했다.부인의 관(棺)에는 흰색 면사포를 넣어주며 작별의 예(禮)를 올렸다.2017년,정회장도 세상을 떠나니 향년 101세였다.인술로 일생을 보낸,백세인생의 귀감이 되었다.한 병의 베지밀에서 정재원의 인술을 느껴보시라.모친 묘소는 대기업도 추동할 수 있는 역량의 혈처에 자리한다.정회장이 수 많은 생명을 살려내고 본인도 장수한 것은 이 묘소의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묘역의 서북방 끝쪽에 자리한 묘소의 맥로는 건해(乾亥;북북서)방의 정자동에서 출발한다.대지산에서 임자(壬子:북)로 전환하여 직진하여 모친 묘소에 정확히 결혈한다.모친의 여기(餘氣)로 자리가 된 정회장 묘소는 역량이 다소 떨어지는 것이 아쉽다. <끝>

>> 그 동안 ‘손건웅의 풍수유람’을 지켜봐 준 독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풍수는 혈처의 역량에 따라 정확히 반응한다.풍수에 잘못이 있다면 풍수가의 문제이지 풍수 본질의 문제가 아니다.화장률(火葬率)이 80%를 넘어섰다.조산(祖山)과 주산(主山) 그리고 좌청룡 우백호 운운하는 전통 이론으로는 풍수의 핵심과 화장(火葬)시대의 풍수를 설명할 수 없다.그래서 연재 중에 전통이론을 기술하지 않고 필자가 체득한 맥로(脈路)이론으로 설명하였다.이제 또 다른 체험과 충전을 위해 졸필을 내려놓는다.인생하처불상봉(人生何處不相逢).다시 만날 인연을 기대한다.


손건웅(孫健雄) 풍수유람가

·춘천고등학교·강원대학교 졸업
·네이버카페 ‘동강의 풍수유람’ 운영
·저서 ‘세상을 풍수로 보다’ 외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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