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창수 소설가
▲ 하창수 소설가
“말을 꼭 이렇게 해야 하나…?” 입만 떼었다면 ‘어록’을 쏟아내는 정치인들을 볼 때마다 씁쓸한 웃음 끝에 비어져 나오는 혼잣말이다.악명이 높아도 유명해지는 거라 노이즈마케팅이란 말까지 생겨났지만,30년 넘도록 작가로 살아온 필자에겐 씨알이 먹힐 리 없는 얘기다.맞춤법에 어긋나면 교정을 해야 하고,앞뒤가 맞지 않으면 논리에 맞도록 고쳐야 하고,표현이 상스러우면 순화해 쓸 수 있는 표현을 찾아야 하는 건 꼭 작가의 의무만은 아니다.

보름 남짓 전,한 야당 국회의원이 상임위원회 발언 중에 ‘겐세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입길에 올랐었다.3·1절을 앞두고 있던 때라 더 그랬다.예전 도지사 시절에 이미 그 말을 사용한 전력이 있던 야당대표는 “겐세이를 쓰지 말아야 한다면 ‘미투’도 외국에서 들어온 말이니 ‘나도 당했다’로 바꿔야 한다”는 기괴한 주장을 펼쳤는데,느닷없이 들고 나온 그의 ‘순우리말 사용론’이 타이즈를 양말바지라 하고 피시방을 기술봉사소라 하는,그가 증오해마지 않는 북한의 그것과 묘하게 통한다고 하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하다.

일본어에서 ‘겐세이’라고 발음되는 단어는 일고여덟 개쯤 된다.가령,권세(權勢)도 겐세이고,입헌정치를 뜻하는 헌정(憲政)도 겐세이다.검도의 달인을 지칭하는 검성(劍聖) 또한 역시 겐세이라고 읽힌다.그러나 문제의 겐세이(けんせい)는 “일정한 작용을 가함으로써 상대편이 지나치게 세력을 펴거나 자유롭게 행동하지 못하게 억누름”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진 ‘견제(牽制)’를 가리킨다.그(녀)는 “내가 가는 길을 왜 막아?”라는 볼멘소리를 ‘겐세이’라는 단어 하나에 일목요연(!)하게 욱여넣은 것이다.

어떤 사람이 누군가의 가는 길을 막아설 때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하나는 “위험하니 가지 말라”는 것이고,다른 하나는 “네가 잘 되는 걸 눈 뜨고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문제의 겐세이는 두 말 할 것 없이 후자다.전자처럼 위험성을 미리 알려주는 건 ‘주의(注意)’라는,일본어로도 ‘쥬이(ちゅうい)’라고 비슷하게 발음되는 말이다.쥬이와 겐세이는 달라도 한참 다르다.쥬이에 담긴 충고의 애틋함을 겐세이에서는 발견할 수 없거니와,겐세이에는 비아냥과 어깃장,시비와 훼방의 기운이 압도적이다.보름쯤 전에 불거진 ‘겐세이’의 진짜 문제점은 여기에 있다.

겐세이를 무람없이 외치는 사람은 “너희들이 잘 되는 걸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다”는 못된 심보를 감추기는커녕 자랑이라도 하듯 드러낸다.그 비아냥과 어깃장과 시비와 훼방의 태도는 치열하고 집요해,사사건건 겐세이를 놓는 것이 그들의 지향이고 정체인 듯하다.그 지향과 정체가 확연히 드러난 것은,지난 주 전 세계를 놀라게 한 김정은과 트럼프의 5월 정상회담 소식이 전해졌을 때였다.그들의 ‘겐세이 정치학’은 요지부동이었고,마침내 “김대중이 노벨평화상을 받을 때 김정일은 핵전쟁을 준비했다.지금 정권은 북핵이 폐기된 양 정치공작을 하고,북한은 위장평화 쇼를 펼치고 있다”는 구태의연한 딴죽걸이로 나타났다.이런 식의 겐세이가 만약 정치라면,정치라서 수용해야 한다면,전쟁만이 평화를 가져오는 유일한 길이라는 끔찍한 생각도 정치고,간절하게 원하면 우주가 도와준다는 신비주의적 언설도 정치적 오지랖으로 품어야 한다.

말이 한낱 ‘소리’에 불과하다면 짖고 울고 으르렁거리는 짐승들과 구분하려고 인간에게 붙여놓은 호모 로쿠엔스(Homo loquens)는 사치스럽기 그지없는 별명이다.말(言)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한,적어도 그는 ‘언어적 인간’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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