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여름 볕에 푸른 고양이/가볍게 안아 보니 손이 가려워/털 조금 움직이니 내 마음마저/감기 든 느낌처럼 몸도 뜨겁다” 일본 근대 시문학을 개척했던 키타하라 하쿠슈의 ‘고양이’라는 시의 도입부다.이 시는 고양이의 외관적 생김과 색채,동작의 운동감,웅크린 심리 등을 오감을 통해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특히 푸른 고양이라는 독특한 조어를 통해 고양이를 신묘하고도 환상적인 존재로 그리고 있다.

고양이는 한자로 묘(猫)라고 하는데,중국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을 나타내는 ‘흑묘백묘(黑猫白猫):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우리 일상에도 “차라리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기는 격”이란 속담이 있을 정도로 매우 친숙한 동물이다.예전에는 고양이를 영물로 여기기도 했고,집에서는 주로 쥐를 퇴치하기 위해 길렀다.하지만 요즘은 개와 함께 대표적 반려동물이 됐다.

6개월 전,도심에서 30분 가량 떨어진 농촌에 살고 있는 필자의 집 주위에도 고양이가 나타났다.산과 들이 있는 지역인지라 도시의 거리를 배회하는 ‘길고양이’라기 보다는 ‘들고양이(野猫)’인 셈이다.첫 대면했을 때는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는 어린 고양이였다.이대로 두면 험한 야생에서 살기 힘들 것 같았다.애처로운 마음에 사료를 사다 주었더니,이젠 아예 집에 눌러앉았다.평소에는 산과 들을 돌아다니다가도 먹이를 줄 때가 되면 어느새 그 자리에서 기다리는 정도가 됐다.

그런데 변하지 않는 것은 여전히 사람에게 곁을 주지 않는 것이다.먹이를 줄 때는 다가오지만 경계의 눈빛은 거두지 않는다.하쿠슈는 그의 시 마지막 구절에는 “뜨거운 여름 볕에 푸른 고양이/볼에 비비어 대니,그 아름다움,/깊게,그윽하게,두려움 가득/언제까지나 한층 안고 싶어라”고 노래했지만,언제나 경계하는 고양이의 이런 속성에 한편으로 서운한 감정까지 들기도 한다.

들고양이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동물에게도 서운한 감정이 들 정도인데,하물며 사람이라면 어떨까.그동안 무심하게 던졌던 숱한 말과 행동들이 상대에게 상처는 되지 않았는지를 돌아본다.‘미투운동’의 쓰나미를 보면서 우린 여전히 사람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요즘이다.

천남수 사회조사연구소장 chonns@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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