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인수 교산허균400주기추모전국대회추진위 상임공동위원장
▲ 정인수 교산허균400주기추모전국대회추진위 상임공동위원장
강릉이 낳은 교산허균(1569-1618년)은 49세를 일기로 서문 저잣거리에서 최후를 마쳤다.당시 광해군의 인정전에서의 역모 죄에 따른 국문(鞠問)의 결과였다지만 당시 사법절차를 무시한 졸속 처형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광해군일기 정초본 131권(1618년 광해10년 8월24일 경진 9번째 기사)에 기록된 내용 중 한때 영의정을 지낸 바 있고 허균의 정치적 동지였던 기자헌은 허균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말하기를 “예로부터 형신(刑訊)도 하지 않고 결안(結案)도 받지 않을 채 공초(供招)만 받고 사형으로 나간 죄인은 없었으니 훗날 반드시 이론이 있을 것이다”고 했다고 한다.형신이란 죄인을 때리며 캐묻던 일,결안은 사형을 결정한 문서를 의미한다.이론이 있을 것이라 예언은 선경지명이라 할 것이다.

광해군은 허균이 처형당하기 직전에 “할 말이 있다” 외치자 그 말을 들어 보려 하였지만 광해군의 최측근 이이첨은 왕의 의사를 무시하고 충동질하여 능지처참에 처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한때 대북파 실력자이자 이이첨과 정치 노선을 같이 했던 이이첨이 허균을 죽임으로서 자신의 정치 기반을 확고하게 하려 했던 야심과 농간의 산물이라는 것이 역사적 평가이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모질었다.허균이 세상을 떠난 5년 후 인조반정에 의해 광해군은 폐모살제(廢母殺弟)죄로 폐위된다.허균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문학성에 대하여서는 그동안 학계를 통해 적지 않게 알려져 본 난에서 지면 관계로 자세한 언급은 줄이기로 하겠다.그러나 차제에 덧붙인다면 서얼철폐에 근거한 평등사상,왕권시대임에도 언감생심 세상에 제일 두려운 존재는 ‘백성이다’라고 갈파한 이민위천(以民爲天)의 사상은 분명,시대를 앞서 간 불세출의 영웅적 인물이라 할 것이다.그가 쓴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홍길동전’에서의 메시지 또한 당시 조선사회의 모순을 희화화했다는 것 역시 그의 비범성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허균 서거이후 수백 년이 지났지만 역적이라는 오명과 더불어 신원(伸寃)되지 못하고 있다.당시 정세를 살펴보자.허균이 비록 광해군 시대에 처형당했다고 하지만 일찍이 광해군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다는 괘씸죄(?)로 인조반정 세력에 밉보여 복관되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광해군 2인자였던 이이첨은 1623년 3월13일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치다가 이튿날 이천에서 붙잡혀 참형 당했다.광해군의 굄을 받았던 상궁 김씨를 비롯한 병조참판 박정길,승지 박홍도를 궁궐 안에서 무참히 도륙했던 것에서 보더라도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던 신하들에 대해서는 냉정했다.또한 인목대비의 광해군에 대한 증오는 물론 허균 살아생전 인목대비 폐위 주장에 앞장섰던 전력이 있는 만큼 허균의 신원은 애당초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닌 가 유추해 보는 것이다.

124년 전 녹두장군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혁명에 참여했던 사람들에 대한 특별법이 제정 된 것과는 성격상 궤를 같이 할 수 없다는 주장이 존재할지 모르지만 과거 왕조시대의 사건에 대해 시공을 초월하여 사실상 소급입법을 제정한 것에서 보듯이 허균 처형 400년이 지난 오늘 날 우리들은 만시지탄 감 없지 않으나 허균의 신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따라서 ‘교산허균400주기추모전국대회추진위원회’는 국회차원의 신원 의결이나 정부 차원의 사면복권을 통한 허균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진력을 다하여 수고를 아끼지 않으려는 것이기에 국민들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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