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춘천 구봉산 중턱에 있는 한 중국식당에 다녀왔다.매일 챙겨야 하는 점심이 때로는 고민이다.뭘 먹을까 뭘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 있지만 보통사람에겐 이게 기실 삶의 전부다.지인 몇 사람과 연락하고 교외로 진출해 식사 겸 꽃구경도 할 심산이었다.애써 그리 작정한 것은 아니지만 그저 그런 쪽으로 움직인 것이다.거기가 거기겠지만 도심을 벗어난 느낌에 몸과 마음이 한결 가뿐해 졌다.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하늘엔 미세 먼지의 얼룩이 가시지 않았다.맑은 것도 아니고 흐린 것도 아니고 어정쩡한 채색이다.어느 한쪽에 편향되지 않은 중립국의 하늘같은 애매한 정서가 이럴 땐 싫지 않다.그 무채색 속에는 더운 기운이 배어나왔다.봄은 왔으되 어쩌면 한편으로 겨울의 남은 뒤끝을,다른 한편으로 서둘러 여름의 앞자락을 끌어안고 있는 것도 같다.봄은 본색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어쩌면 앞뒤의 계절을 다 품었다.

산 중턱은 하루가 다르게 음식점과 카페가 들어서고 있다.각양각색의 꽃이 피어나듯 구봉산 허리를 수놓듯 한다.시내가 내려다보이는 풍경은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특별한 감흥을 준다.봉의산자락으로 화천과 인제 쪽에서 빠져나온 물줄기가 만나 몸집을 불린 북한강은 다시 서울로 향한다.두 물줄기는 춘천의 앞뜰을 휘돌아 숨을 돌리고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흘러간다.병풍처럼 빙 둘러선 산과 이 물줄기는 서로를 아우르는데 궁합이 좋아 보인다.

자리를 잡고 보니 식당의 격자 창 밖으로 턱 밑에서 야산이 시작된다.때마침 피기 시작한 진달래와 산수유가 참 곱다.흐린 날씨는 이 봄날 꽃그림의 배색이 돼 은근한 정취를 더했다.식사를 하는 동안 눈과 주변 풍경이 익숙해지면서 물아(物我)가 하나가 되는 듯하다.자리를 일어설 때는 산자락의 꽃들도 한층 화사해진 것 같다.이런 때 참지 못해 시 한 수 터져 나온다면 이 봄날의 화룡점정이 될 것이다.

한용운 선생의 시 한 구절을 떠올려 그런 아쉬움을 달래본다.“지난 겨울엔 눈이 꽃같더니(昨冬雪如花)/이 봄엔 꽃이 눈같구나(今春花如雪)/눈도 꽃도 참이 아닌데(雪花共非眞)/어찌 마음은 찢어지려 하는가(如何心欲裂)”돌아오는 가로에 만발한 벚꽃이 함박눈처럼 휘날린다.모처럼의 이 짧은 봄나들이가 꿈인가 생시인가.눈(雪)도 꽃(花)도 참(眞)이 아니라지만,잠시 외물(外物)에 흔들렸다한들 또 어떠랴!

김상수 논설실장 ssookim@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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