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진 자리를 오래도록 보았다.황량하고 쓸쓸하다.천지를 물들였던 화사함은 사라지고 꽃받침만 남은 자리,고요와 적막이 깃든다.짧아서 아쉽고,잠깐이라서 애틋한 봄날의 추억은 그렇게 스러졌다.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 괜한 말은 아닐터,덧붙여 권불십년(權不十年)!다시 꽃 진 자리를 들여다본다.무엇인가 있다.보일듯 말듯 새로운 생명이 숨을 쉰다.보잘 것 없는 그 자리에 열매가 맺히고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그럼 그렇지.존재했던 모든 것은 흔적을 남기는 법이지.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건 자연의 이치이자 순환.세대를 잇는 숭고한 사명이다.벚나무는 한 그루에 수만송이의 꽃을 피우지만 열매를 맺는 꽃은 절반이 채 안 된다.그 열매도 비바람에 흔들리고 벌레에 먹히며 온갖 시련을 겪게 마련.생명을 지키고 보전하는 여정이 간단치 않다.인고의 시간이 흘러 기다림이 절정에 이르면 그때 비로소 생명의 몸부림이 잦아든다.잔인했을지도 모를 시간을 스스로 정리하는 것이다.모든 생명이 그러하듯이….

세상 참 시끄럽다.음습한 거래의 베일이 벗겨지면서 권력의 꽃잎이 속절없이 떨어진다.실체도 없는 리튬개발에 발목 잡힌 포스코 회장이 임기 2년을 남긴 채 직을 던지고,황의 법칙을 창안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KT 황창규 회장이 정치후원금에 고개를 떨군다.어찌 이들뿐이랴.권력이 바뀌면서 흩날리는 무수한 꽃잎들.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꽃받침이 없다.기약할 내일도 없다.남기고 간직할 것이 없다.사람의 흔적과 자연의 흔적이 이처럼 다르니 그저 허무할 뿐.

김기식 금융감독원장이 결국 옷을 벗었다.새옷으로 갈아입은 지 15일 만이다.결코 벗고 싶지 않았을 옷,오래도록 입고 싶었던 갑옷이었을 게다.그러나 그 갑옷을 벤건 남에겐 지나칠 정도로 엄격하고 자신에겐 관대했던 ‘도덕적 기준’이었다.다른 누구의 칼도 아닌 자신의 칼.바뀐 권력에 속수무책이었던 한국당이 상대방의 연속된 헛발질에 신바람(?)이 날 법도 한데 표정관리가 대단하다.오히려 섬뜩한 ‘자기 고백’을 한다.“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우리도 그래서 망했다”고.이 고백,한국정치가 오래도록 새겼으면 싶다.허무하게 스러지는 정치가 아닌,남는 정치를 할 수 있도록….다시,꽃 진 자리를 본다.

강병로 논설위원 brkang@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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