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호백 전 양양우체국장
▲ 정호백 전 양양우체국장
초등학교 2학년이 끝나가는 늦은 겨울,소달구지에 짐을 꾸려 싣고 우리 가족은 읍내로 이사를 했다.진눈깨비 질퍽거리는 길로 달구지를 따라 가는 그날,하늘에는 요란한 굉음을 내며 쌕쌕이(제트기) 들이 우리 이사행열의 반대방향으로 날아가는 모습이 내내 보였다.아버지는 우리가 살던 고향의 서쪽 큰 산 너머에서 군사훈련을 하는 것 같다고 하셨다.나는 어릴 적부터 그 산 너머에는 넓은 다른 세상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자랐다.그 산은 너무나도 높아서 어린 우리들은 그곳에 오를 엄두도 못 내는,말로만 듣던 신비로운 곳이었다.어른들은 그곳을 ‘서풋개울’이라고 불렀다.그곳의 넓은 초원 복숭아나무 아래로 소와 염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맑은 냇물엔 버들치와 가재가 있는 깨끗한 동네라는 생각을 나는 가지고 있었다.미지의 세계….그 시절부터 그 곳은 나의 ‘이상향’이 되었다.그 날 이사를 하면서 훈련하는 쌕쌕이가 나의 이상향을 폭격하여 망가뜨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들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어느 봄날,복사꽃이 만발한 길을 운전하고 가던 중 ‘소푸개울’이라는 간판을 보고 깜짝 놀랐다.내가 아는 ‘서풋개울과’ 이름이 비슷하고 방향은 다르지만 같은 읍내에 있어서 호기심에 간판을 따라 동네를 들어 가봤다.넓지는 않지만 거기엔 체험농장이 있었고 차로 골짜기를 한참 들어 갈 수 있었다.한참을 들어 간 후 길이 좁아지자 차를 세우고 좁은 길을 따라 걸어서 더 깊숙이 들어 가봤다.좁은 계곡사이로 실개천이 있고 이름모를 새가 지저귀는 소리도 들렸다.냇물가에는 진달래,산철쭉과 개복숭아꽃이 만발해 있고 파릇한 버드나무가 움을 틔우고 있었다.더 깊은 골짜기에는 남아 있는 어름 아래로 냇물이 졸졸졸 흐르고 있었다.어름 밑 돌을 들추고 보니 놀랍게도 가재가 보였다.더 이상 민가가 없는 그 곳은 물소리 새소리외에 어떤 소음도 없었고 냇물은 바로 마셔도 좋을 정도로 깨끗했다.실제로 어린 시절 물을 먹듯 나뭇잎을 오무려서 물을 마셔보니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갑고 신선한 맛이었다.길은 더 이상 갈 수 없을 정도로 나무가 우거져서 잠시 멈춰서 하늘을 쳐다보았다.순간 나는 깜짝 놀라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하늘 끝 동쪽에는 내 어릴 때 보았던 서쪽 높은 산이 보였기 때문이다.실제로 내가 어릴 때 보지 못했던 이상향 서쪽 큰 산 너머 ‘서풋개울’이 바로 여기였던 것이다.

나는 미지의 땅을 찾은 것처럼 기뻤지만 아쉽기도 했다.어릴 적 동경하던 이상향이 우연찮게 현실로 나타난 것에 대한 허무함도 엄습해왔다.내가 본 이상향에는 초원의 소와 염소는 없었지만 만발한 꽃에 맑은 시냇물과 가재는 있었다.그 후 인터넷의 항공사진을 찾아 본 결과 내가 살던 서쪽산 바로 아래에 ‘소푸개울’이라는 작은 개천이 있었다.작지만 내가 바라던 이상향을 찾은 것이 너무 신비롭고 인생에 한가지 수수께끼를 풀은 듯한 느낌이었다.삭막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크고 작은 이상향을 품고 살아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또 언젠가는 그 이상향에 다다르게 되어 마음의 평온을 찾을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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