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가르침이 몸과 마음에 배어 있다면,
그것이 곧 법이돼 일상 속에서 늘 함께할 수 있어

▲ 법검 우송 신흥사 주지스님
▲ 법검 우송 신흥사 주지스님
하루 앞으로 다가온 부처님 오신 날을 잘 맞이하기 위해서는 부처님께서 어떤 분이셨는지,어떤 깨달음을 얻으셨는지,그리고 어떤 가르침을 남기셨는지를 깊이 참구해보아야 합니다.이러한 질문을 던져야만 비로소 부처님오신날을 잘 봉축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경전에는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들어있습니다.‘어떤 사람이 내 가사 자락을 붙들고,내 발자취를 그림자처럼 따른다 할지라도 만약 그가 욕망을 품고 조그만 일에 화를 내며 그릇된 소견에 빠져있다면 그는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고,나 또한 그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왜냐하면 그는 법을 보지 못하고 법을 보지 못한 이는 나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여기서 말하는 법이란,부처님께서 평소에 가르쳐 주신 교법이나 교훈을 말합니다.위의 가르침에 따르면,진정한 불자는 부처님 가르침을 순간순간 그대로 실천하는 불자를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부처님께서는 설사 내 가사자락을 붙들고 내 그림자처럼 나를 따른다하더라도 생각이 다르고 뜻이 다르면 나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그런 존재라고 설하고 계십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또 어떤 사람이 내게서 천리 밖에 떨어져있을지라도 그가 욕망 때문에 격정을 품지 않고 화를 내는 일도 없으며,그릇된 소견에 빠져 있지 않고 불심이 견고해서 부지런히 정진하고 있다면 그는 바로 내 곁에 있는 거나 다름이 없고,나 또한 그 곁에 있는 거나 다름이 없다.왜냐하면 그 사람은 법을 보는 자이고,법을 보는 자는 곧 나를 보는 자이기 때문이다.’한 마디로 말하면,나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라면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늘 함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스승과 제자 사이이든,또는 부부나 연인 사이이든 한 공간에서 살더라도 뜻이 같지 않으면 그건 서로간의 거리가 구만리와 마찬가지입니다.뜻이 같아야 한 가정과 한 가족을 이루고,또한 한 도량을 이룰 수 있습니다.석가모니 부처님과 현재 실존하는 우리 사이에는 시간적으로 2500여년이라는 긴 세월이 가로 놓여있습니다.거리 또한 수만리나 떨어져 있습니다.그렇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일상에 그대로 적용한다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지금 이 자리에서 함께 할 수 있습니다.이처럼 살아있는 교훈은 늘 현재진행형입니다.2500년 전,어떤 특정한 사회에서 어떤 대중에게 한 설법이라 하더라도 그 교훈이 살아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귀 기울여 들을 수 있습니다.선불교에서는 이러한 말을 살아있는 말이라 하여 ‘활구(活句)’라고 합니다.

반면에 죽은 교훈은 과거완료형입니다.이미 과거로 끝난 것입니다.그래서 죽은 말이라 하여 ‘사구(死句)’라고 합니다.부처님의 가르침은 언제 어디서나 늘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에 활구 그 자체라 할 수 있습니다.부처님께서는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나를 보는 자는 곧 법을 본다.”라고 누누이 강조하셨습니다.부처님의 가르침이 몸과 마음에 배어 있다면,그것이 곧 법이 되어 일상 속에서 늘 함께할 수 있습니다.출가 제자건,재가 제자건 법을 볼 수 있다면 곧 부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우리가 두손모아 부처님오신날을 봉축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진리 그 자체인 법이자,늘 살아있는 활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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