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창수 소설가
▲ 하창수 소설가
지난달 칸 영화제에서 아쉽게 황금종려상을 놓치긴 했지만 영화관계자들이 입을 모아 ‘대단한 작품’이라 상찬한 이창동의 ‘버닝’을 보고나서 몇 가지 감회를 페이스북에 올렸는데,한 페친으로부터 곤혹스런 메시지가 날아왔다.꽤 긴 내용을 축약하면 ‘전문가들이 좋다고 하는 영화에는 왜 관객이 들지 않는가?’라는 것.오랫동안 줄기차게 물었지만 명쾌한 답을 찾지 못했던,답은 할 수 있으나 뒤통수가 뜨끈해지는 이 난감한 질문에 나는 결국 답을 하지 못했다.“저도 모르겠습니다”라고 하기엔 나름대로 이유를 알고 있었고,그 이유를 발설하자면 꺼내야 할 ‘수준’이니 ‘눈’이니 하는 민감한 단어들을 사용하고 싶지 않았으며,그것들을 사용하지 않고선 또 뜻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2003년 강우석의 ‘실미도’가 처음으로 천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영화업자들 사이에선 ‘천만 관객’이 마치 반드시 점령해야 할 성이나 고지인 것처럼,거기에 다다르기만 하면 영화적 가치가 고스란히 담보되고 달성되는 듯 여겨져 왔다.이후,작년에 개봉한 ‘택시운전사’와 ‘신과 함께’가 동시에 천만을 넘어선 것까지,천만 관객을 넘어선 영화가 스무 편이 넘는다.이 중 ‘아바타’와 ‘겨울왕국’,‘인터스텔라’와 어벤져스 시리즈 두 편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우리나라 영화다.2014년에 개봉한 ‘명량’은 무려 1700만 명 이상이 보았다.

많은 관객들이 보았다는 게 좋은 영화를 의미하는 건 아니라는 이야기나 관객 동원에 실패한 것 중에도 얼마든 좋은 영화가 있다는 이야기는 새삼스러울 게 없다.그러나 관객이 들지 않아 슬그머니 극장에서 사라진 영화들 가운데 천만 명 이상이 본 영화보다 객관적(!)으로 더 좋은 영화가 있다면,천만 명이 아니라 그 반에 반만 본다 해도 세상이 바뀔 수 있는 가치 있고 훌륭한 영화가 있다면,‘왜 진짜 좋은 영화는 많은 관객들이 보지 않는 걸까?’라는 것은 반드시 물어야 할,머리를 맞대고 답을 찾아야 할 의문이다.사실 이 의문에 적어도 한 가지 답은 알고 있다.가치 있고 훌륭한 영화는 머리만 아프게 할 뿐 재미라곤 없어서,그 어떤 덕목도 ‘재미’를 능가할 수 없는 지점-필연적으로 오락이어야 하는 영화의 한계다.

영화는 태생적으로 오락의 산물이다.영화로 지극한 ‘예술’을 했던 탁월한 영화작가들이 있었지만,그들은 어디까지나 예외적 존재들이었다.출발부터 영화는 철저하게 투자와 이윤이 지배하는 산업이었고,멀티플렉스의 탄생으로 흥행가능성이 있는 하나의 작품을 위해 수십 편의 영화가 희생돼도 개의치 않는 이즈음엔 더 철저하게 산업화된 장르다.이런 상황이라면,세계 최고의 영화제에서 전문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았어도 개봉한 지 보름이 지나도록 50만 명의 관객을 넘지 못하는 영화란 극장에서 사라질 날을 기다려야 하는 운명에 놓인 ‘실패한 영화’에 불과하다.

지난 4월 아주 잠깐 극장에 걸렸다가 사라진 한 영화가 있다.개인적으로 최근 본 우리나라 영화 가운데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훌륭했지만,고작 2만 5787명이 보았을 뿐이다.임수정이 주연을 한 이동은의 ‘당신의 부탁’.나는 이 영화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청소년 문제와 가족문제를 풀어내는 그 어떤 법안이나 제도보다 효과적이란 생각이 든다.개인적으로 꼽는 최근 한국영화 탑(Top) 5의 나머지 네 편도 하나같이 관객동원에는 ‘실패’했다.‘소수의견’(38만 3582명),‘4등’(3만 9032명),‘한공주’(22만 5603명),‘여배우는 오늘도’(1만 6929명).모두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문제들을 깊고 처절하게 다룬 영화다.

‘오락’의 수준은 그 ‘사회’의 수준이기도 하다.“영화는 젊은이들로 하여금 제대로 된 어른의 이상과 목표의식을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오락이다.” 20세기 초중반을 살았던 월트 디즈니의 이 말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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