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 광 복 논설위원

 이남이는 5거리 돼지갈비집 어두컴컴한 목로에 앉아있었다. 헐렁한 티셔츠에 구깃구깃 구겨진 통 넓은 바지 차림, 늘 그런 모습이었다. 벙거지 대신 별로 폼 안 나는 골프 모자를 쓰고 있었다.
 "요샌 벙거지 안 씁니까?"
 "머리도 가끔 햇볕을 쐬어야 하니까요."
 그의 말투는 언제나 그런 식이다. 그리고 허허 웃었다. 그는 아이 같은 눈과 약간 살집 있는 부드러운 얼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렇게 웃을 때야 콧수염에 가려있던 그 얼굴이 드러나는 것 같았다. 두 달 전 춘천 퇴계동 노래방 '레인보우'를 남에게 넘겼단 소리를 들었다. '밥줄'이 끊겼는데도 그는 걱정 근심 없다는 표정이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사는 방법을 알고 있으니까."
 옆자리 공사장 인부들의 대화와 섞여도 전혀 튀지 않는 말이었다. 그 너무도 인간적인 분위기를 그만 돼지갈비집 여주인이 깨고 말았다. 사인 좀 해 달라고 장부책 뒷장을 펼쳐 내민 것이다.
 "처음엔 너무도 닮았다고만 생각했어요. 나 왕년에 팬이었걸랑요."
 여주인은 쪼르르 밖으로 나가 1회용 카메라도 사왔다. 그리고 왕년의 스타 옆으로 의자를 당겨 앉아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남이는 조금 전보다 더 근심걱정 없는 표정이 되어있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데, 가수 특히 저 사람은 죽어도 그의 노래 '울고 싶어라'는 남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공전의 히트를 했던 '울고싶어라'의 명성 하나만으로도 그는 5거리 돼지갈비집 목로에 앉아있을 사람이 아니다. 그가 용인에서 5년간 농사를 짓다가 마흔에 다시 활동을 시작할 때였다. 88년 해밀턴호텔 밤무대에 서다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서 '울고 싶어라'를 불렀다. 돌아온 이남이의 스테이지 매너에 팬들은 넋을 잃었다. 마침 청문회 정국이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울고 싶었다. '울고 싶어라'는 폭발적 반응을 넘어 거리에 넘치다 시피 했다. 이남이는 한국 록의 붐을 일으킨 '사랑과 평화'의 창단 멤버다. '울고싶어라'는 오히려 그의 그런 기념비적인 명성까지 묻어버렸다. 그런 그가 10여 년 동안 종적을 감췄다가 홀연히 춘천에 나타났다. 한 잡지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그동안 중광 스님을 따라 전국 각지를 돌며 명상도 하고 시도 지으며 살았어요. 이외수 형님이 계신 춘천에 정착한 후로는 저 혼자 산사를 찾아다니며 참선의 시간을 가졌지요. 객관적인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의식을 좇다보면 온갖 분노와 미움들이 사그라지죠. 하산 때는 외수형님 사랑방에 들러 지인들과 문학, 음악을 논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동안 음악 동료들조차 만나지 않았던 그에겐 춘천의 예술인, 이외수 팬들과의 만남이 세상을 엿보는 유일한 문틈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은둔자가 되나보다 했던 그가 다시 음악을 시작했다. 이외수의 사랑방에 꾀이던 '춘천산' 음악인들을 모아 '철가방프로젝트'란 그룹을 만들었다. '면발이 길까요 인생이 길까요 일단은 살아봐야 아는 거지요 번개가 빠를까요 철가방이 빠를까요 일단은 주문부터 하시지요' 그렇게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겠다는 뜻으로 이외수가 지었다는 '철가방프로젝트'란 이름도 그렇지만, 기존의 포크음악과 락의 결합체 '포크록'이란 새로운 장르, 드럼대신 북과 장구를 도입한 퓨전, 모두가 기상천외이다. 그만큼 모두들 마지막 끼를 발산하다 말겠지 했었다. 그러나 아니다. 2000년 5월 그룹이 결성된 이래 방송이란 방송은 다 탔다. 재작년 가을 철가방프로젝트1집 음반을 내더니, 오는 6월 2집을 내기 위해 한창 녹음 중이다. 단 한 곡 남의 것을 빌리지 않은 오로지 창작곡이라는 사실도 놀랍다. 더 놀라운 것은 아직도 나 같은 사람들이 이 그룹을 누가 불러주면 정말 중국집 철가방 달려가듯 찾아가 흥이나 돋우는 회갑집 풍각쟁이 정도로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홈페이지를 열었다가 깜짝 놀랐다.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울산 청주, 심지어 경기도 한 초등학교까지 그들의 열렬한 팬은 너무 많았다. 이남이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기타 김성호 박광호, 북 허남일, 베이스기타 엄태환은 그야말로 스타, 짱이었다. 이남이의 딸 단비(보컬)는 딸 덕분에 아버지를 더 유명하게 만들고 있었다.
 어디선가는 '철가방'이 춘천에서 왔단 말로 대신해 부르는 '춘천에 뜨는 달'을 '00에 뜨는 달'로 개명하면 시가(市歌)로 삼겠다고 회유도 하는 모양이다. 지방의 어느 그룹이 이렇게 뜰 수 있단 말인가. 춘천에, 강원도에 기막힌 문화상품이 만들어진 것이다. 철가방프로젝트가 춘천을, 강원도를 역외수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남이도, 멤버들도 적어도 춘천에서는 대접받고 살아야 한다. 하물며 근근한 호구지책이던 노래방을 문닫을 수밖에 없게 된 사정이 말이나 되는 건가. 사실 나는 그게 안타까워 이날 만나자고 전화를 했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철가방프로젝트는 정처 없이 갈 겁니다. 그것도 수행이겠지요."
 그의 말끝에 돼지갈비집 주인이 쟁반을 들고 일어서며 거들었다.
 "제가 서비스 좀 할게요. 저도 춘천사람이니까."
 그가 콧수염을 들썩이며 또 한번 허허 웃었다. 즉흥시의 귀재인 그가 '5거리 돼지갈비집 주인은 인심도 좋고…', 뭐 그런 노랫말을 생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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