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상철 전 원주시장
▲ 한상철 전 원주시장
인문학마니아들과 함께 방문한 일본 대마도 일정은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더욱 남다른 의미를 주고 있다.

대마도의 많은 사찰에는 선열들의 애국과 매국의 자취가 혼재해 있다.수선사에는 구한말 최고령 의병장으로 대마도에 끌려와 상투를 자를 것을 요구받자 단식을 벌이다 40일만에 병사한 최익현의 혼령이 깃들어 있다.서산사는 통신사들의 숙소로 쓰이던 장소이나,토요토미 히데요시 앞에서도 조선 사신의 옹골찬 기개를 보이던 김성일의 시비 하나만이 덩그러니 볼 수 있다.천택사 한 켠에는 당대 명필이라는 이완용의 친필 묘비 글씨도 보였다.

대마도 인문학의 백미는 역시 덕혜옹주비다.고종의 고명딸로 일본 땅에 보내져 대마도주와 강제결혼 후 정신병원에 감금되는 등 비운의 삶을 살던 마지막 황녀다.남편 소다케유키(宗武志) 또한 자국 정부의 음모와 계략에 따라 덕혜옹주와 불운한 결혼생활을 힘겹게 이어가다 파탄에 이르렀으나,덕혜에 대한 애정은 남달랐던 듯하다.

탐방 3일차인 마지막날,중도에 원통사에 들러 조선의 대표적인 대일외교관 충숙공 이예(李藝) 선생 공적비 앞에 섰다.이예는 당시 울산 관아의 아전 신분으로 모시던 수령이 왜구들에게 대마도로 잡혀가자 끝까지 따라가 구출한다.세종은 그를 지극히 총애하여 종 2품의 가선대부까지 승차시킨다.72세로 사망할 때까지 40여차례 일본을 넘나들며 왜구관리,피로인 쇄환,대일조약 체결 등 눈부신 업적을 남긴다.

이번 대마도 인문학 기행을 총 정리하는 자리에서 제기된 공통된 의문과 아쉬움은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는 기록은 있는가? 있다면 왜 이를 방치하였는가?’였다.우리의 보물로 지정된 숙종조의 ‘해동지도’에는 대마도를 조선 영토로 그리고,‘백두산을 머리로,대관령을 척추로 하고 탐라와 대마를 양다리로 한다’고 명기해 놓았다.

세종께서 이종무를 시켜 정벌한 후 역대 왕들이 군대를 주둔시켜 실효적 지배를 해야 했건만,그저 경상도 대마주(對馬州 ) 우리 땅이라는 관념으로 버려두어 임진왜란의 전초기지가 되고 지금도 부산의 코앞의 섬을 남의 땅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현실이 통한으로 남는다.탐방기간은 짧았으나 그 여운과 감흥은 무척이나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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