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길 '동해북부선'을 열자] 2. 양양구간 현장을 가다
종착역이자 출발역이던 양양역
6·25 전쟁 때 집중폭격 후 폐허
여관·식당 즐비하던 역 일대엔
기차 플랫폼·일부 노반만 남아
주민 “영북지역 번화한 중심부
금강산 관광 꿈 싣던 애환담겨”

동해북부선의 출발역이자 종착역이었던 양양역과 선로는 지금 사라져 옛 성세조차 구전으로만 확인되고 있다.사라진 역터에는 잡초가 가득하고 농로로 변한 선로에서는 더이상 기차가 다닐수 없지만 역사 주변에 남겨진 플랫폼 흔적과 하천에 덩그러니 남은 일부 교각들은 이곳이 기찻길이었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본지 취재진의 요청으로 철길 흔적을 쫓던 팔순의 주민은 “동해북부선은 그냥 열차가 아니다.동해안 서민들에게는 가족의 희망인 자식을 대처(서울,일본)에서 교육시킬 수 있었거나,가족 모두 인생에 단 한번 갈수 있었던 금강산 관광의 꿈을 실어나르던 애환이 담긴 철길이었다”고 회상했다.

# 양양역-흔적도 없이 사라진 옛 동해북부선 출발지

1937년 12월1일 개통한 양양역.양양군 양양읍에 있는 동해북부선의 대표적인 철도역이다.원산까지 이어졌던 동해북부선의 종착역이자 출발역으로 당시를 기억하는 주민들은 창고들이 둘러쌓고 있을 정도로 역사 규모가 컷다고 밝혔다.하지만 6·25 전쟁으로 운행이 중단된 1950년까지 14년간 양양과 원산을 이어주는 역사는 기간 시설물인 탓에 한국 전쟁 당시 집중 폭격을 맞고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본지 취재진이 찾아가 본 옛 양양역이 있던 자리에는 석재공장이 들어서 있었다.이 일대는 철도청 부지여서 석재공장은 물론 주변 논밭은 주민들이 임대료를 내며 사용하고 있다.과거 기차길로 쓰였다는 좁은 길을 쭉 따라가다보니 우거진 수풀 속에서 기차 플랫폼(승강장처럼 사람들이 모여들 수 있는 곳)을 어렵게 발견할 수 있었다.기차 플랫폼과 곳곳에 남아있는 노반만이 이곳이 과거 역사였고 기차가 달렸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현장에서 만난 채복성(80·양양)씨는 이 플랫폼에 대해 “일제가 만든 기차 플랫폼”이라며 “당시 철도국에서 근무하던 아버지를 따라 이곳에 자주 놀러왔기 때문에 생생히 기억한다”고 말했다.이어 “종착역이었던 양양역은 기차를 돌릴 수 있는 철로가 여러 개였고,규모도 제법 큰 편에 속했다”고 회상했다.
 

▲ 철도노동자였던 김지윤(84·양양)씨가 일제시기 양양광업소의 철광물을 광산에서 동해북부선 옛 양양역까지 실어 나르던 철길을 가르키고 있다. 박상동
▲ 철도노동자였던 김지윤(84·양양)씨가 일제시기 양양광업소의 철광물을 광산에서 동해북부선 옛 양양역까지 실어 나르던 철길을 가르키고 있다. 박상동

그는 또 “서울과 금강산을 가려는 사람들,공부를 하는 학생들 등 많은 사람들이 양양역에 몰려 일대가 북적였다.역사 주변에는 수많은 여관과 식당들이 즐비했다”고 증언했다.채씨에 따르면 당시 양양지역은 영북지역에서 크고 번화한 도시였다.양양역에서는 하루 4차례씩 양양의 철광석을 가득 실은 증기기관차가 연기를 내뿜으며 원산방면을 향해 달렸다고 한다.당시 1층 단층건물로 지어져 있던 양양역에는 역장을 비롯 선로반,기관부 직원 등 100여명에 가까운 인원이 근무를 했고,직원들이 이용하는 관사도 여러 채 있었다.

운행당시에는 원산~양양 간 여객열차가 오가면서 지역주민과 금강산 등을 찾는 관광객 등의 이용도 많았다.오전 5시 양양역을 출발하는 첫 차를 시작으로 오전 10시,오후 4시,오후 9시 등 하루 4차례 운행했던 열차는 원산으로 유학하는 학생들의 통학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했다.또 양양역 주변과 하천에 설치된 교각은 이곳 마을 아이들에게는 놀이공간으로 이용됐다.채씨는 “어릴 때는 하천 곳곳에 설치된 ‘삐얏돌(교각)’에서 다이빙을 하면서 놀았다”며 “현재는 대부분이 철거됐지만 끝부분 삐얏돌은 양양과 속초,고성지역 군데군데에 남아있다”고 말했다.

한반도의 동해안을 따라 달리는 종단철도 노선인 동해북부선은 객차와 함께 15~20량 정도의 화물칸이 함께 운행됐고,화물칸에는 양양지역의 목재와 자철광광업소의 철광이 가득 담겨있었다.그러나 8·15 해방으로 양양이 남북으로 갈라지면서 공사가 중단,동해북부선은 이름 그대로 동해 북부에서만 운행하는 기차가 됐다.이후 1950년 6·25전쟁 중 대규모 폭격으로 인해 양양역사와 철로가 완전히 파괴됐다.1953년 영업을 재개했으나 서류상의 부활이었고,1967년 공식 폐역될 때까지 열차운행은 이뤄지지 않았다.이렇게 영북지역을 대표하던 양양역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 때문에 일부 주민들을 중심으로 옛 동해부북선의 흔적들이 일제 수탈의 산 역사이자,지역의 자부심을 심어줄 수 있는 향토사학으로서의 가치가 높다고 보고 기록 및 발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이들은 지난 2004년 정부가 교각 등 동해북부선 흔적을 일제의 잔재로 보고 철거할 당시 강력히 반대에 나서기도 했다.양양문화원 부설 향토사연구소 김광영(65·전 사무국장)연구원은 “양양역은 당시 우리 고장의 가장 큰 건물이었지만 사진 등 관련자료가 하나도 없다.현재 주민들의 기억에 의존해 그림으로나마 양양역의 모습을 복원하고 있다”고 말했다.향토사연구소 김양식(73·춘천면옥 대표)연구원은 “당시 양양역사 외관은 속초박물관에 재현해놓은 속초역과 비슷했지만 규모는 훨씬 컸다”며 “동해북부선 가운데 양양~원산구간은 당시 영동지방에서 서울로 가는 가장 빠른길이었던 만큼 상징성이 크다.양양구간 노선이 기존 노선을 쓸지,새 노선을 쓸지도 관심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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