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말기 한국문학 지켜낸 심연수 시인 탄생 100주년
‘무적보’ 등 자필시집 10권
소설·수필·평론·기행문 등
장르 오가며 창작혼 불태워
용정 동흥춘 문예부 활동
학습지 활용한 습작물 가득
치열한 문학활동 생생히 담겨
낡은 수첩 5권 속 일기에
가난한 삶과 창작열정 공존
2.습작노트 담은 문학의 꿈과 생애
3.편지 엽서 366점에 비친 강원인의 삶
4.근대사 조명과 문학사료 활용
표지와 표제가 있는 자필시집은 ‘무적보’ (1940년) ‘思ひ出草’(1940년) ‘빈사초’ (1941년) ‘지평선’(1941년) ‘수평선’(1942년) 5권이고 표제 없는 것이 5권이다. 표지있는 1권은 ‘떠나는 젊은 뜻’ (1941년)으로 첫 시가 시작된다. 나머지 4권은 표지조차 없이 400자 원고지를 반으로 접어 엮은 시고집이다. 학계에서는 첫 시를 작품집명으로 붙여 ‘여명’(1941년) ‘야업’(1942년) ‘부두의 밤’ (1943년) ‘우주의 노래’(1944년)으로 불린다, ‘무적보’는 1940년 5월 용정을 출발해 서울, 금강산, 원산 등지 등 고국을 돌아보는 수학여행 과정에서 창작된 작품 중 65편을 골라 엮은 당시로는 보기 드문 시조집이라는 점이 인상적이다.
미공개된 습작시로 수학문제풀이 위에 쓴 ‘푸른 여름’, 영어 단어 노트 위에 쓴 ‘아침’, 화학 공책에 쓴 ‘어머니’ 등이 있으며 수학학습장에 쓴 수필 ‘신입생’ 도 발견되었다. 시 ‘불 탄 자리’ ‘쏟아진 잉크’, 수필 ‘본대로 들은대로 느낀대로’ , 소설 ‘농가’ 등 완성된 작품의 초고 자료를 통해 치열하게 습작하였던 심연수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심연수 시인이 남긴 5권의 작고 낡은 수첩에도 독서와 창작에 대한 열망이 드러난다. 시인의 흑백사진에는 윗옷 주머니에 늘 만년필이 꽂혀있는데 멋으로 착용했음직한 동창생과 달리 윗옷 왼쪽 주머니는 불룩하다. 실제로 작은 수첩을 늘 들고다녔고, 손때 묻은 수첩이 오롯이 남아 시인의 체취를 전한다.
가로 세로 7.5×11.5㎝ 크기의 연청 표지의 수첩은 원래 영어단어장으로 쓰려던 것이었으나 1938년 12월 19일부터 쪽수를 매겨가며 1939년 5월 6일까지 일기를 쓰고있다. ‘1939년 1월 28일 ‘봉춘군과 같이 서점에 가서 서적을 사고 오다’ ‘3월 25일 시내 누이집를 거쳐 서점을 지나 집에 와’ ‘3월 26일 학교에 가서 이군과 같이 등산(동산)하다가 전봉협군을 방문 서점을 지나오다’ ‘3월 27일 이군과 같이 등산하고 또 도서를 드리다’ ‘3월 29일 학교에 가서 놀다가 서점을 거쳐오다’ ‘3월 30일 학교에서 오다가 동양서점에서 50전 책을 사다’고 쓰여있어 서점 방문을 특별한 기록으로 남기고있다.
궁핍에 시달리면서도 책에 대한 욕심이 커서 가족에게 늘 죄인이라고 고백했던 심연수. 학비를 벌기 위해 간도 조선인촌을 곳곳이 누빈 경험은 독서열과 습작열의 재료가 됐다.
가로 세로 10.5×17㎝의 검정색 표지의 수첩 1937년 3월 24일 내용에는 ‘추운 바람을 받으며 혼자 무인지를 산넘어 30리길을 걸어 오후 3시경에 유수천에 도착하여 김건원씨 댁에서 자다. 오늘 길은 참으로 외로웠다. 추움은 잊어버리고 땀으로 젖었고 덛물 난 간수를 건너노라 젖어서 바지가 다 저젖더라’고 쓰였다.
겨울방학 중인 1940년 1월 1일 수첩엔 영풍둔 박일송 한호윤 촌공소사무실에서 ‘척사대회가 있었다. 그것은 참으로 조선의 고전적 유희엿음으로 절실히 감득하였노라’고 적고있다. 1월 3일은 삼도강둔 ‘교장 고병기씨와 대성중학교 출신인 이승희선생을 만너서 만은 위안을 받고 있엇노라 학교선생님 숙사는 참 자미었더이다 야학을 구경하다 그리고 학교숙사에서 유숙하다’고 쓰였다.
닳아빠진 신발에서 삐져나온 엄지발가락을 지문 찍듯 돌아다녔다고 토로했던 심연수의 남다른 경험은 시대의식으로 뭉쳐지고 언어로 갈무리되었으며 21세기 고국의 품에 안겼다. 박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