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말기 한국문학 지켜낸 심연수 시인 탄생 100주년
문학사료 편지 289점·엽서 77점
생전 단오 풍속 이야기 글로 담아
가족과의 편지 속 결혼 날짜 등
시인 생애·문학배경 연구 도움
보편적 강원인 풍속·정서 바탕
애틋한 가족애 창작으로 승화
일제 사회상도 생생하게 증언

1.방대한 문학사료와 미공개 동시

2.습작노트 담은 문학의 꿈과 생애

3.편지 엽서 366점에 비친 강원인의 삶

4.근대사 조명과 문학사료 활용

▲ 심연수는 일본에서 유학하면서 할머니,아버지,어머니,동생에게 각기 편지를 써서 여러장을 한꺼번에 보냈다.할머니와 부모에게 1942년 8월 12일 보낸 안부편지.
▲ 심연수는 일본에서 유학하면서 할머니,아버지,어머니,동생에게 각기 편지를 써서 여러장을 한꺼번에 보냈다.할머니와 부모에게 1942년 8월 12일 보낸 안부편지.

28세의 불꽃같은 삶 심연수 시인(1918~1945)이 살아있으면 100세가 되는 날인 지난 3일 고향 강릉단오제전수교육관에서 기념대회를 가졌다.이날 시민들은 ‘소년아 봄은 오려니’ ‘고향’ ‘만주’ 등을 담은 시부채 퍼포먼스를 펼치며 고향에서의 생일을 마음껏 반겼다.심연수는 인류무형유산이 된 단오제를 유난히 즐기는 강릉사람의 DNA 그대로 생전에 단오 풍속에 대한 인상을 여러 번 일기와 편지에 남겼다.일본 유학 당시 안부를 전한 4월의 편지에서 도쿄의 날씨는 간도 용정의 단오 무렵이라고 쓰고 있다.고학하며 공부하느라 단오 날짜를 잊어버릴 정도로 바빴다고 털어놓기도 한다.1941년 4월 7일 편지에서는 2월에 일본에 건너온 뒤 학비 생활비 벌려고 노동하려했으나 ‘피로증이 나서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없다.목 얼굴 할 것 없이 아물고 보면 또 나고 하기에 무엇도 할 수가 없다.’고 힘겨운 처지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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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4월 12일 결혼 후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는 강원인의 정서를 느끼게한다.
심연수 문학사료 중에 편지 289점,엽서는 77점이 있는 것으로 기자는 확인했다.아직 미분류된 편지들도 있어 향후 더 늘어날 수 있는 방대한 양이다.용정에서 줄곧 살았던 동생 심호수가 간직해온 것이어서 주로 가족과 주고받은 내용으로 심연수의 생애와 문학적 배경을 밝히는 데 요긴하다.심연수의 대학 졸업식 날짜는 1943년 9월 13일,결혼날짜와 장소는 1945년 4월 6일 용정 중앙교회당으로 편지에서 드러났다.1943년 10월 중 도쿄의 자취집에서 학도병 징집령 반대한 석별회를 가진 직후 행방이 묘연하였는데 ‘그동안 어데 좀 가서 있느라고 아모 소식없이 있었다.집도 무사하겠지’라며 빠른 필치로 10월 31일 시모노세키항구에서 보낸 엽서가 발굴됨으로써 표면적으로 말 못할 사정과 귀환시점을 알려주고 있다.독립운동가 여운형 및 학도병 징집 반대를 증언했던 고 강근모와 관련된 편지도 포함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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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연수가 1939년 8월 4일 양양을 방문하면서 원산역에서 부친 엽서.
7남매 중 장남이었던 심연수는 가족에게 문학만 하는 자신은 늘 죄인이라고 여겼다.1942년 ‘섣달 스무날에 형쓰노라’하면서 동생 학수에게 보낸 편지에서 ‘경제가 불충분한 우리집에서 나같은 용열한 욕심쟁이가 있고보니 온 집안식구가 늘 근심만하게 되는 줄 안다.그러나 오래지 않었다.한 열아무달만 참으면 될 줄 믿어다구.’라며 수시로 생활비를 요청하는 미안함과 위로를 전하고 있다.용정 외곽의 길안툰 집까지는 편지 배달이 되지 않았기 때문인지 동생이 다니는 학교를 수신처로 한 편지에서 ‘호수 근수 해수 보아라.호수야 어룬들게 너머 근심끼치지말어라.내 오는 여름방학에는 어떻게 하도록 힘쓰마.집을 떠나도 좋다.여비만 벌어두어라.근수야 너는 더욱 힘써 배워야한다.’고 당부하고 있다.

심연수는 가족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시 창작으로 승화했는데 ‘어느나라 늙은이가 뉘집 늙은이가 이렇게 참혹하게 일을 할가.이렇듯 고생하시다 돌아가신 하라버지시여! 하라버지시여!’라며 장시의 ‘돌아가신 하라버지’를 꾹꾹 눌러썼다.1938~1939년 동흥중 화학공책에 최초로 쓴 미공개 습작시 제목은 ‘어머니’였다.1945년 8월 8일 피살되기 몇 달 전 백보배와의 결혼을 앞두고 부모와 주고받은 편지는 심연수 뿐 아니라 보편적인 강원인의 풍속과 정서를 엿볼 수 있다.

‘부주전상서 (중략) 혼례식 대해서는 너무 번잡하게 할 것없는 줄 아나이다.그것도 제가 나가서 해도 넉넉하오니 미리 할 것없는 줄 아외다.그러나 동내손님만이야 몰리할수없을 것이오니 양3월 말 4월초에 쓰도록 탁주쯤은 준비가 있어으면 하나이다.’ -1945년 3월 17일 편지



‘어머니 전상서.저이들을 떠내보내느라고 많이 수고하섰지요.둘이 다 잘 왔습니다.오늘은 솟도 하나 더 사고 다른 것도 몇가지 샀나이다.내일 모레쯤은 우리 손으로 밥을 끓이게 되겠지요.어머니 날이나 따뜻하시면 어떻게 있나 오서보십시오.’ -1945년 4월 12일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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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정 제일당사진관에 의뢰해 찍은 결혼식 사진에 자신의 발이 잘려있어 몹시 마음 상했다는 내용의 편지도 불안한 미래를 암시한 듯 눈길을 끈다.1941년 8월 12일 ‘할머니 전상서’ ‘부모 양친전상서’ ‘호수야 보아라’라며 한꺼번에 여러통을 집으로 보낸 편지에서도 시인의 섬세함과 함께 장남의 무거운 책임감이 드리워있다.한편 일본에서 발신한 봉투에 심연수는 국적을 ‘조선’ ‘일본’으로 번갈아쓰기도 하고 두꺼운 봉투를 쓰라고 동생에게 주문하는 등 검열을 염두에 두었음을 보여준다.봉투에 심연수와 창씨개명한 ‘三本義雄’을 쓰고있으나 편지 말미는 언제나 ‘연수’로 마음대로 편지를 쓰지도 부치지도 못한 일제강점기의 사회상을 빛바랜 편지가 생생하게 증언한다. 박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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