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덕림 전 매일경제 편집부장
▲ 이덕림 전 매일경제 편집부장
우중에도 능소화가 쉴새없이 꽃을 피워내고 있다.예로부터 ‘장마를 알리는 꽃’으로 불리어온 터라 어릴 적 어른들 말씀은 능소화 꽃봉오리가 맺히면 장마가 임박했다고 하셨다 울타리 둘레에 도랑을 파서 물길을 내고 서둘러 논에 고인 물을 빼내는 등 장마에 대비하는 모습을 익히 보아왔다.꽃들에겐 시련기일 수밖에 없는 장마철을 가려 개화하는 능소화.유별나다싶은 생태만큼 꽃송이 또한 신비로운 색을 지녔다.

능소화는 빗줄기속에서도 찬연하다.우중충한 날씨에도 화사한 색깔을 뽐낸다.한 가지 색이 아닌 복합색이다.꽃잎 바깥쪽은 밝은 오렌지색, 꽃술이 있는 안쪽으로 갈수록 붉은 빛이 감도는 금빛을 띈다.그러데이션(gradation) 화법에서처럼 색조가 차츰 짙어져간다.화심(花心)은 무지개의 두 번째 색, 선명한 주홍빛이다.천상의 선녀들이 입은 천의(天衣)의 색이 아닐까?

능소화가 숨겨놓은 자태를 드러낼 때는 따로 있다.잠시 비가 멎고 푸른 하늘이 드러난 때다.창공을 배경으로 활짝 핀 꽃잎들이 펼쳐질 때의 화려함은 환상적이다.눈 부실만큼 찬란하다.중국 백과사전 설명에 능소화를 일러 ‘금등화’와 ‘자위’(자줏빛의 백합과 둥굴레의 뜻)라는 별칭을 붙인 것도 바로 신비한 꽃 색깔 때문일 것이다.

알고 보면 능소화는 ‘무엄한’ 이름의 꽃이다.한자 뜻풀이로 ‘하늘을 범한 꽃’이다.줄기차게 흡착근(吸着根)을 내면서 하늘을 향해 뻗어 오르는 능소화의 특성을 두고 붙여진 이름이리라.중국 전설에 따르면 옥황상제가 사는 하늘의 궁전을 ‘능소전’이라 부르는 것으로 미루어 작명이 범상치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그래서일까.예전엔 반가에서만 기르고 여염집에선 심지 못하게 했던 ‘특권층’ 꽃이었다.

37년을 기거한 변두리 단독주택에서 심고 가꾼 능소화 덩굴 밑동이 장정 팔뚝만큼 굵게 자랐다.빗소리에 잠을 깬 아침 현관문을 열고나서면 마당은 온통 꽃밭으로 바뀌어있다.아침에 피어 저녁에 지는 능소화 꽃잎들로 이루어진 화원이다.꽃잎새도,꽃색깔도 흐트러지거나 변색되지 않은 채 나붓이 땅에 내려앉아 있다.능소화의 낙화는 추레하지 않다.깨끗한 요절(夭折)이다.

영어 이름 ‘Chinese trumpet creeper’가 원산지,꽃의 모양,덩굴식물임을 설명해 주듯 능소화의 고향은 중국의 장강(長江:양자강) 유역이다.따뜻한 곳을 좋아해 예전엔 중부지방에선 보기 어려운 화목이었다.

하지만 겨울이 많이 따뜻해지면서 지금은 우리 고장에서도 잘 자란다.기후변화의 선물(?)이긴 한데 양구나 화천,인제,철원 쪽에도 뿌리를 내렸는지 궁금하다.

음습하고 후덥지근한 장마철.자칫 울적하고 짜증스런 기분에 젖기 쉬운 때.어디서나 능소화의 밝고 환한 미소를 반갑게 맞이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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