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창수 소설가
▲ 하창수 소설가
2020년까지 최저임금 1만원을 달성하려던 약속을 지키기 힘들어진 대통령이 사과의 변을 토로하던 날,서울의 한 원룸 화장실에서 24살 청년의 시신이 백골 상태로 발견되었다.사흘 뒤,저소득층의 노동을 장려하기 위해 정부가 4조원 가까운 자금을 지원한다는 내용이 실린 포털사이트 다른 한 면엔 세계최대 전자상거래업체 ‘아마존’의 시가 총액이 1000조원을 넘어섰다는 기사가,그 아래엔 한국에까지 무료배송을 검토하고 있다는 내용이 링크돼 있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들이 있다.가난한 자들과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우리가 알고 있는 부자들은 “아직 더 벌어야 해”라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후자에 속하고,“이 정도면 부자야”라고 생각하는 꽤 많은 자들은 그들의 통장잔고가 실은 별 거 아니라는 점에서 전자에 속한다.이 논리를 받아들인다면,세상에 부자는 없다.존재하는 건 오직 부자를 지향하는 자들뿐이다.그들 사이에 간간이,‘자발적 가난’을 삶의 지표로 간직한 1% 미만의 가난한 사람들,즉 ‘진짜 부자’들이 존재한다.

거대한 영지와 수많은 소작농들을 거느린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난 19세기 러시아 최고의 작가 중 한 사람이었던 이반 투르게네프는 부모가 죽기만을 기다리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부모의 유산을 물려받기 위해서가 아니라,온갖 수모를 견디며 살아가고 있던 농노와 소작농들에게 그 땅들을 모두 돌려주기 위해서였다.그리고 그는 부모가 세상을 떠난 순간 그렇게 했다.한국전쟁의 와중에 북에 남겨두고 온 아내와 6남매를 그리며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던 장기려 박사는 치료비가 없어 병마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위해 무료병원을 운영한 ‘바보 의사’였다.그가 창설한 우리나라 최초의 의료협동조합 4층짜리 진료소엔 냉방시설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었지만 그의 집에는 수십 년이나 사용한 선풍기가 신음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진정으로 부유한 자가 되는 ‘자발적 가난’의 반대편에 절대 권력이 있다.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는 말은 희언이 아니다.하(夏)의 걸왕(傑王)은 고기로 산을 쌓고 포로 숲을 이룬 육산포림(肉山脯林)으로 나라를 망쳤고,은(殷)의 주왕(紂王)은 술로 연못을 채우고 고기로 숲을 이룬 주지육림(酒池肉林)으로 왕조를 끝냈다.이 추접한 전통은 4000년이 흘러 한반도에까지 상륙해 29만원밖에 없는 통장을 가지고도 온갖 호사를 누리는 기묘한 신공을 펼치거나,멀쩡하게 흐르는 강들을 틀어막는 데 수십조의 나랏돈을 쓰고도 훗날의 역사가 평가할 거라고 헛소리를 지껄이거나,막역지우와 한 통속이 되어 기업의 수장들에게 대놓고 손을 벌리다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 나랏님들로 유유히 전승되었다.

부유와 가난을 가름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돈에 대한 생각’이다.아파트 옥상마다 설치된 물탱크 하나에 가득 찬 물이면,플라스틱 양동이를 양손에 든 채 낡은 슬리퍼를 끌고 먹을 물을 길으러 매일 아침 수십킬로의 흙길을 오가는 아프리카의 어린아이들이 한 해 동안 먹을 수 있다.이들의 삶을 열악하게 만든 것은 이들이 가난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부를 나누어가지려고 생각하지 않는 수많은 ‘부유한’ 인간들의 이기심이다.지금의 세계는 단 한 사람도 굶지 않아도 될 만큼의 부를 가지고 있지만,해마다 5세 미만의 아이들 중 1000만명이 허기진 배를 끌어안고 죽어가고 있다.바깥의 열기가 고스란히 밀려들어 선풍기가 온풍기가 되는 쪽방촌의 여름은 돈이 없어 연출된 가난의 풍경처럼 보이지만,실은 소외의,녹이 잔뜩 슬어 열리지 않는 우리들의 빈곤한 마음의 풍경이다.돈밖에 모르는,돈밖에 가진 것이 없어 가난하디 가난한,우리의 처절하고 서글픈 마음이 만들어낸 풍경이다.가난의 책임은 ‘그’들에게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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