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 27일 토요일 이른 아침,서울 고려대학교 정문 앞을 지나던 사람들은 난데없는 탱크의 위력에 깜짝 놀랐다.박정희 대통령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돼 대학 뿐만 아니라 전국의 주요시설에 탱크가 주둔했던 것이다.필자가 실제 목격했던 ‘10·26’ 비상계엄의 한 장면이다.

이듬해 5월17일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됐다.그런데 18년 철권통치를 해 왔던 대통령의 갑작스런 유고로 내려졌던 10·26 계엄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국회는 해산되고 김대중을 비롯한 주요 정치인들은 구금됐다.학생운동 지휘부도 대거 검거됐다.언론검열도 강화됐다.계엄사에 의해 삭제된 신문기사가 빈칸 상태로 발행됐던 이전과 달리,빈칸도 반드시 채워진 상태로 제작돼 배포됐다.광주민주화운동의 시작이기도 했다.

지난 20일 박근혜 정부의 기무사령부가 국회와 주요 언론사,국가정보원 장악 등 촛불집회 당시 계엄령 선포를 실행할 구체 계획을 담은 문서가 공개됐다.이 문서에는 촛불집회가 열렸던 광화문 광장 등에 기갑사단과 특전사 배치하는 것 뿐만 아니라 국회대책과 언론 사전검열,언론사에 대한 계엄사 요원 배치 계획등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5·17 계엄 당시와 다른 점은 인터넷 포탈과 SNS 차단 대책이었다.

2017년 3월10일 만약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이 기각됐더라도 촛불집회는 이어졌을 것으로 보인다.그만큼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농단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는 들끓고 있었다.반면 탄핵반대 집회에서는 계엄령 선포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계엄령 선포를 적극 검토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더구나 태극기 집회와 촛불집회 참가 인원수를 두고 논란을 벌이기도 했으니,다수 국민의 뜻이라고 여론을 호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번 사태에 대해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은 “정치적 혼란이 있으면 당연히 북한군의 동향을 철저히 살피고 전방 부대의 전투태세를 강화해야 하는데,오히려 전방에 있는 병력을 후방으로 빼서 국민을 상대로 질서를 잡겠다는 발상 자체가 전근대적 사고방식”이라고 지적한다.38년이나 지나 전근대적인 ‘계엄령’을 다시 접하는 국민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천남수 사회조사연구소장 chonns@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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