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화 그늘, ‘ 진짜’ 여우는 없다
애니메이션 ‘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
주인공 여우 ‘ 폭스’ vs 가금업자
정체성· 실존 위해 양계장 사냥
늑대와 조우 ‘ 무언 인사’ 계기
인간 문명 길들여진 자아 인식
순수 야생일 수 없는 현실 풍자

대중문화에서 ‘대중’은 양적으로 많음을 의미하는 ‘매스(mass)’나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파퓰러(popular)’로 번역되고는 한다.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는 가장 대표적인 대중문화라고 할 수 있지만 모든 텔레비전이나 영화가 많은 사람들의 선택을 받거나 인기를 누리는 것은 아니다.특히 영화의 경우,대중의 호불호에 더욱 영향을 받는다.지난 주말만 하더라도,단 두 편의 영화가 81%의 좌석점유율을 차지했다.인기 없는 영화는 조조나 심야영화 시간대로 밀려나거나 서둘러 막을 내리는 수밖에 없다.지금의 구조로서는.

하지만 관객확보에 실패했다고 해서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그 중에는 오랜 시간 동안 마니아를 형성하거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영화도 있다.무더운 날씨에 에어컨 있는 곳으로 피신을 떠나야 할 당신에게,오늘은 오래된 영화를 소개한다.웨스 앤더슨 감독의 애니메이션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Fantastic Mr.Fox)와 ‘개들의 섬’(Isle of Dogs).두 작품은 국내흥행에 완전히 참패한 영화이다.2008년과 2017년,십 년의 시간을 두고 제작된 두 영화의 관람인원은 합쳐서 겨우 5만 정도이다.그러나 이 두 영화의 반짝거리는 상상력과 그 속에 숨겨진 날카로운 풍자는 이 영화에 시선을 둘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블록버스터 영화에 잠시 지쳐있다면, 휴가철에 하루 평균 330마리씩 버려지는 반려동물을 걱정해 본 적이 있다면,양계장의 닭들의 운명에 대해 고민해본 적이 있다면 한번쯤 권하고 싶은 영화다.
 

▲ 영화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의 한 장면.
▲ 영화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의 한 장면.

두 애니메이션이 웨스 앤더슨 감독의 다른 영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애니메이션 작품이라는 것과 제목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처럼 동물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또 하나,이들 영화는 ‘스톱모션(stop motion)’ 기법으로 제작되었다.주인공이 될 인형을 만들고 매 동작을 섬세하게 움직여서 촬영한 새로운 방식으로서,이전의 문법을 깨뜨린 영화이다.툭툭 끊어지듯 연결된 화면은 어색한듯하면서도 신선하게 다가온다.두 영화를 제한된 지면에서 모두 다룰 수 없어 여기에서는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기로 한다.이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은 여우지만,이걸 동물영화로만 보아서는 곤란하다.이 영화는 인간과 동물의 이야기이다.‘판타스틱 미스터 폭스’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인간과 다를 바 없다.그들은 직립해서 걷고 수트를 입고 다닌다.신문 칼럼니스트인 폭스는 사춘기 아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으며 그의 아내는 취미로 그림을 그린다.이렇게 문명화된 동물이지만,인간과의 관계는 그리 원만하지 않다.미스터 폭스는 인간의 이웃이 되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전망 좋은 집으로 이사한다.그의 이웃은 하루에 12마리의 치킨을 먹어치우는 양계업자 보기스,거위와 오리를 키우며 거위 간을 넣은 도넛을 먹는 번스,칠면조와 사과주(이것도 개량종이다)를 만드는 빈이다.농장을 가진 폭스의 인간 이웃은 모두 동물과 함께 살지만,그 동물들은 가축화되어 사육된다는 점에서 다르다.그들의 운명은 ‘먹거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다.이 영화에 등장하는 두 부류의 동물은 그런 면에서 차이점을 가진다.길들여진 동물과 길들여지지 않는 동물.
 

폭스는 인간에게 가까이 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경계하는 아내와 주머니쥐에게 말한다.“나는 야생동물이야.” “내가 누구지? (… …) 나는 지금 실존적 질문을 하는 거야.거북한 표현이지만 어떻게 여우가 입에 닭을 물지 않고 행복해질 수 있겠어?”라고.그는 문득문득 자신이 야생동물임을 되새기고 위험을 감수하며 살아있는 닭,거위,오리를 훔친다.미스터 폭스의 계속된 ‘사냥’으로 인간과 동물 사이에 일대 결전에 벌어진다.보기스,번스,빈은 그들의 사업에 막대한 손해를 끼치는 동물들을 완전히 몰아내기로 결정하고 굴착기를 비롯한 온갖 장비를 동원해 동물들이 사는 곳을 파괴해 버린다.이런 가운데 폭스의 조카가 인질로 잡히자,동물들은 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조카 구출 작전을 펼치기로 결정한다.각자의 장점과 개성을 가진 동물들,각각의 라틴어 학명을 가진 동물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조카를 구해내는 장면은 웃음을 유발하면서도 감동적이다.폭스의 조카를 구출해 오는 길에 폭스는 네 발로 걷는 ‘진짜 야생동물’인 늑대와 마주친다.폭스는 영어와 라틴어로 늑대에게 말을 걸지만 문명-야생에 살고 있는 그들은 도무지 소통할 수 없다.폭스는 라틴어로 ‘너는 카니스 루퍼스(늑대)’ ‘나는 불페스 불페스(여우)’라고 말하지만,인간이 정한 학명 따위가 쓸모없는 늑대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그 순간 미스터 폭스와 늑대는 가장 동물다운 언어, 앞발을 들어 무언의 인사를 나눈다.미스터 폭스는 그가 그토록 되고 싶어 했던 야생동물의 진짜 모습을 확인하고 눈물을 글썽이며 작은 감탄사를 내뱉는다.“정말 아름다운 창조물이야.” 폭스는 스스로 ‘야생동물’임을 자처했지만 그도 결국은 인간이 만든 문명 속의 야생동물이었을 뿐이다.폭스의 눈에 잠시 고였던 눈물은 많은 의미를 갖고 있다.문명화된 언어로 소통할 수 없었던,정말 야생동물 같은 날렵한 허리와 긴 네 다리를 가진 늑대는 숲으로 들어가 버린다.

영화의 초반,두 부류로 보였던 동물은 다시 세 갈래로 나뉜다.사육되는 동물,사육되지 않는 야생동물,진짜 야생동물.인간에 의해 터전을 잃은 동물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폭스를 비롯하여 터전을 잃은 동물들은 인간이 만든 하수도를 이용해 새로운 거처를 만들고 다시 살아갈 궁리를 한다.이미 상당 부분 문명화된 지구에서 살아가는 ‘완전한 야생’일 수 없는 동물들의 비애,수트를 입고 복면을 쓰고 고작 양계장에서 ‘사냥’하면서 야생동물의 본성을 들먹이는 폭스의 허세를 보고 있자면,그 유쾌함에 폭소를 터뜨리다가도 어느새 미스터 폭스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모르게 잠시,눈물이 고인다.


>>> 유강하 교수

연세대에서 중국 고전문학(신화)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강원대 인문과학연구소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저서로 ‘고전 다시쓰기와 문화 리텔링’ ‘아름다움 그 불멸의 이야기’ 등 10여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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