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구봉씨 이산가족 상봉자 선정
북 형님 상봉의뢰로 만남 성사
“사망처리 해도 희망놓지 않아
선물 넣었다 뺐다 며칠째 반복”

▲ 지난 11일 속초 교동 자택에서 이산가족 상봉자에 선정된 장구봉(82)씨와 아내 김명자 씨가 적십자사가 보내준 형 장운봉(86)씨의 사진을 보며 곧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다.
▲ 지난 11일 속초 교동 자택에서 이산가족 상봉자에 선정된 장구봉(82)씨와 아내 김명자 씨가 적십자사가 보내준 형 장운봉(86)씨의 사진을 보며 곧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이미 사망 신고까지 마친 형이 북한에서 70여년만에 저를 찾으니 꿈인지 생시인지…”70여 년 만에 북에 있는 형을 재회하게 된 장구봉(82·속초·포레스건설 대표·전 도배구협회장)씨는 이산가족상봉이 10일 앞으로 다가오자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곳곳에서 공습이 지속되던 1950년 9월 말 양양군 속초읍 논산리(옛 북한땅,현재 속초시 조양동)에서 살던 당시 16살이던 형 장운봉씨는 동네 주민들과 함께 북으로 며칠만 피신해있다가 내려오겠다고 말한 뒤 연락이 끊어졌다.북으로 올라갔던 동네 주민들은 1·4후퇴 때 내려와 “(장운봉씨가)폭격에 죽었을 거다”는 소식을 전하자 장씨의 어머니는 “그때 북으로 올라가는 걸 말렸어야 했다”며 실신했던 것으로 장씨는 기억한다.당시 장씨의 가족들은 혹시 모르는 마음에 북으로 가보려 했지만 이미 휴전선이 그어졌고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금단의 땅으로 바뀌었다.

이후 30여 년이 지난 1980년 행방불명자 신고가 의무화되면서 가족들은 형 장운봉씨를 어쩔 수 없이 사망 처리해야 했다.그렇다고 실낱같은 희망은 놓지 않아 장례나 제사를 따로 치르지 않았다.지난 11일 속초 자택에서 만난 장씨는 “어머니는 1999년(향년 90세)에 숨지기 직전까지도 ‘우리 큰아들 어디 있냐’며 편히 눈을 감지 못했다”고 눈물을 훔쳤다.

한국전쟁으로 형을 잃어버린 지 70여 년이 지난 지난 7월 15일 장구봉씨에게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 북측 상봉의뢰자 장운봉(86)씨가 동생을 만나고 싶다”는 대한적십자사(한적)의 전화였다.당시 숨을 쉴수가 없었다는 장씨는 바로 그자리에서 승낙한후 눈물만 났다고 한다.그리고 기약 없는 기다림 속에 3주 정도 지난 이달 7일 한적에서 이산가족 상봉자에 선정됐다는 연락을 받고 가족들은 오열했다.

이날 장씨의 누나인 장순봉(89)씨는 어머니의 영정사진을 안고 “어머니가 그렇게 찾으시던 우리 동생 이제야 찾았다”며 몇 시간을 오열하다 탈진해 쓰러졌다고 한다.장순봉씨는 이제 90을 바라보는 나이에 안 아픈 곳이 없지만 이번 이산가족상봉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장씨는 형에게 선물할 옷,먹거리,화장품 등을 적십자가 정해준 30㎏에 맞추기 위해 하루에도 짐을 넣다 뺐다 반복하고 있다.장씨는 “꿈만 같은 일이 이뤄져 요즘은 밤잠을 설치고 있다”며 “형과의 만남이 너무 설레고 기대된다”고 말했다.장씨는 오는 23일 속초 하나콘도에서 하루 묵은 뒤 오는 24~26일까지 금강산으로 가서 형 장운봉 씨와 70여 년 만에 재회한다. 한귀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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