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일 없는 것이 눈물 나게 고마울 때가 있다.아픈데 없고,직장에서 잘리지 않고,목돈 들어갈 데 없이 잔잔하게 이어지는 삶.우물에 돌덩이 날아들듯 경기 나는 일이 벌어지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이 정도면 자족할 수 있지 않을까.내 친구는 가끔 전화를 걸어 “잘 있지?별일 없는 거지?”라고 묻는다.뜬금없다.그러면서 “다행이다.이 상황에 너라도 별일 없으니…”하며 안도한다.나의 별일 없음에 안도하는 내 친구의 너그러움(?)이 고맙다.행복해진다.소소한 것이 시시하지 않다.

올 여름은 유별나게 무더웠다.긴 폭염을 어떻게 견뎠는지 신기할 따름.많은 서민들이 구성원으로서의 삶과 개인의 삶을 힘겨워 했을 것이다.그 힘겨움이 파국으로 끝나지 않아 다행.절기는 어느 덧 가을로 들어섰다.이틀 뒤가 백로(8일).기러기가 날아들고 새들이 먹이를 저장하는 때다.밤 기온이 소슬해져 이슬이 맺히고,벼 이삭이 고개를 숙여 풍요를 예고하는 시기다.백로를 잘 넘겨야 낱알을 제대로 거둘 수 있다는데 세상일은 심상치 않다.알곡 대신 쭉정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린다.불길한 예감.

경제지표가 곤두박질 쳤다.급기야 소득주도성장을 빗댄 ‘저성장 주도 저소득’ 얘기까지 나왔다.한국은행이 엊그제 발표한 ‘2분기 국민소득(잠정)’ 지표는 충격적이다.2분기 실질 국민총소득(GNI)이 전 분기 대비 마이너스로 돌아선 것.우리 기업과 정부,국민들이 벌어들인 전체 소득이 1분기보다 줄어들면서 총저축률은 5년여 만에 최저치로 떨어졌다.소비도 확 줄었다.버는 돈이 적다 보니 쓰임새를 줄인 것.이대로 가면 정부가 목표로 한 2.9% 성장이 가능할 것 같지 않다.경제가 꼬꾸라지고 개개인의 지갑이 얇아지면 ‘소소한 행복’은 기대하기 어렵다.안부전화도 뜸해질 테고.

일본 작가 구리 료헤이가 쓴 단편소설 ‘우동 한 그릇’이 외환위기 당시 큰 인기를 끌었다.섣달 그믐날 밤 굶주린 세 모자 앞에 놓인 우동 한 그릇에서 시작되는 이 소설은 가난과 희망을 핵심 주제로 다룬다.남편이 교통사고를 낸 후 피해액을 갚느라 어려운 생활을 하지만 희망을 잃지 않았던 세 모자의 고난 극복기.그러나 이 소설이 다시 대중적 인기를 끄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아프고 괴로운 얘기를 반복해서 읽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이 가을엔 제발 별일 없기를….

강병로 논설위원 brkang@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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