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경 선병욱 11정보통신단 소령 부인

▲ 김동경 선병욱 11정보통신단 소령 부인
▲ 김동경 선병욱 11정보통신단 소령 부인
남편이 날 보고 환하게 웃고 있다.어느덧 불혹을 넘어선 중년 남자의 얼굴이 내 초점에 잡힌다.매일 보던 얼굴이지만 당혹스러울 만큼 낯설다.더구나 그 주름들은 너무도 당당해보이기까지 했다.나는 요 녀석들을 뻔뻔한 것들이라고 분노할 것인지,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인지 방황하고 있었다.하지만 복잡한 심경과는 달리 내 머리와 가슴은 어느새 20년 전 남편을 처음 만났을 당시로 전력질주하고 있었다.도착한 그곳엔 약간 마른 남자가 서있다.남편이다.날 보는 눈빛이 맑고 반짝인다.약간은 장난기를 머금은 그 눈빛은 20대의 싱그러움을 날것 그대로 뿜어내고 있다.의아하게도 이것 또한 생경한 순간이다.

남편이 막 중위 계급장을 달았을 때 우리는 결혼했다.나는 그리 길지 않은 직장생활에 적응을 해나가던 시점이었다.나의 부모님은 남편이 휴가 때마다 들고 왔던 가시오가피 엑기스(그 당시에는 상당히 고가였다)와 남편의 서글서글함과 애교에 홀딱 넘어가셨다.지금 생각해보면,그 당시 남편의 애교는 내 인생에서 꼽을만한 불가사의 중 하나이다.한편 시부모님은 먼 곳에서 혼자 고생할 막내아들이 애달파 결혼을 서두르셨던 것 같다.그렇게 양가 어른들의 무서운 추진력에 힘입어,나는 겁도 없이 결혼이란 걸 하게 되었다.

신혼집은 강원도 철원 마현리에 위치한 관사였다.수색대대 옆에 위치한 곳이었다.한 지붕 아래 좌우로 출입문을 두고 두 집이 사용할 수 있는 단층 건물이었다.데칼코마니처럼 대칭을 이루는 이러한 집들이 비탈진 곳에 계단식으로 층층이 자리 잡고 있었다.부모님은 순수하게 지지만을 해주셨다.그간 모아둔 자금은 결혼식 비용 및 신접살림 장만에 다 쓴 터라 ‘아낄 수 있는 부분은 아끼자’라는 것이 우리 부부의 생각이었다.신혼집을 아기자기하게 꾸미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1년 후에 이사할 것을 생각하니 그것도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다.과감히 도배를 포기하고 싸구려 장판을 깔자 나름 지저분하지 않을 정도의 구색은 갖추어졌다.후에 전해들은 말이지만,마현관사와 신혼집을 보고 간 형부는 그때부터 처제인 나를‘날개 없는 천사’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와 천사대열에 합류할 군인가족들이 무수히 많을 것이라고 확신한다.지금의 사회적 풍토는 어떨지 모르나,그 당시 군인가족들 사이의 분위기는 확연히 실용주의적 가치관이 주류를 이루었다.

강원도 강릉이 고향인 우리 부부에게 철원은 가깝고도 먼 곳이었다.그 당시에는 구불구불한 대관령 길을 오르락내리락 해야 했기에 3시간 30분이 소요되었다.게다가 강릉에서 철원으로 바로 가는 버스가 없어서 강릉-동서울터미널-와수리-마현리 순으로 거치면,대기시간 포함하여 약 7시간이 소요되는 곳이었다.신혼 초 중고차도 없었던 우리 부부에게는 고향인 강릉보다,산하나 사이에 두고 있는 북한이 훨씬 더 가까운 곳이었다.살림이 익숙해질 때쯤,난 새로운 고민을 하게 되었다.마현관사 뒤 보이는 저 산 뒤편이 북한이라고 하던데…불안감이 엄습해왔다.전쟁이라도 나면?남편은 국가의 부름을 받고 임무수행을 위해 전쟁터로 향할 것이 분명한데,피붙이 하나 없는 이 곳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마현리 땅에 나는 그대로 묻히는 것인가?고민 끝에 남편에게 물어봤으나,어이없다는 반응과 함께 국가기밀이라며 얘기해주지 않았다.나는 남편의 사명감을 존중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고,더 이상 묻지 않았다.그리고 몇 해에 걸친 결혼생활 후 알게 되었다.남편은 대답하기 애매하거나 모르는 상황에 대한 질문에 답할 때 항상 ‘국가기밀’이라고 한다는 것을…

이 글을 읽는 어떤 이는 의아할 수도 있을 것이다.2000년대 초반은 전쟁의 위협을 느낄만한 사회적 분위기가 아니었다.김대중-노무현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햇볕정책의 황금기였다.하지만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때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뉴스속보와 지역주민들의 불안스러운 대화 및 실체를 드러낸 북한의 잠수함을 통해 온몸으로 북한의 존재를 실감했었다.무장공비 소탕작전 과정에서 다수의 군인과 민간인 사망자도 나왔다.이러한 기억들은 나에게 불안요소로 작용하기 충분한 것이었다.그런 내가 차츰 안정을 찾게 된 것은 주위 군인가족들 덕분이었다.배달음식은 엄두도 못내는 깊숙하고도 동떨어진 곳이라,마현리의 이웃이라고는 마현관사에 거주하는 군인가족들이 전부였는데,그분들이 먼저 다가와서 문을 두드려 주었다.

20대 중반의 어린 신부에게 마현관사는 녹록지만은 않은 곳이었다.태어나 처음 실물을 본 뱀부터 시작하여 쥐약을 먹고 시뻘겋게 눈이 뒤집혀 비닐현관문 앞에 드러누워 있던 들쥐와 밤만 되면 무섭게 울어대던 고양이들까지.게다가 낯선 관사 분위기도 한몫했다.내가 누구 부인인지 말하지 않아도 아는 사람들.갑자기 선배라며 찾아와 다과회에 초대하는 사람.처음 보는 사람임에도 친근하게 다가와 말을 걸고,스스럼없이 어울리는 사람들.내 집,네 집 구분 없이 왕래하며 사는 관사 사람들의 모습은 이웃사촌을 넘어서 가족 같은 모습이었다.처음에는 낯설고 거부감이 들었다.하지만 곧 알게 되었다.그들도 나처럼 남편 따라 이곳까지 오게 된 것임을.또한 그들도 거친 땅을 일구어 터전을 다지듯,노력하고 있음을 말이다.군인가족으로서 첫걸음을 뗀‘마현관사’는 그렇게 나에게 풋사랑처럼 다가온 곳이다.모든 것이 서툴고,뭘 해도 어색하고,뭘 해야 할지도몰랐던 그런 곳.하지만 시간이 지나 회상했을 때,풋풋함에 나도 모르게 푸스스 웃음을 흘리게 되는 곳.그런 곳이다.여기까지가 내 추억의 끝자락이다.한 케이블 채널에서 역대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을 아는가 모르겠다.나는 1997 세대이다.삐삐에서 휴대폰으로,MS-DOS에서 Windows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생생히 겪은 세대.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동시에 겪은 세대이다.1세대 아이돌인 H.O.T와 S.E.S노래에 열광도 했다.

대학교 1학년 때 만난 남편은 풋과일의 떫은맛부터 농익은 과일의 진한 맛까지 그야말로‘내 인생의 모든 맛’을 함께한 사람이다.나름대로 정의내리긴 했지만 아무튼 디지털 1세대로서,동시대를 산 친구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상황과 환경,그리고 졸지에 나를 천사로 등극시켜 준 나의 신혼은 그렇게 추억이 되었다.남편을 만나 군인가족으로 살지 않았다면,나 또한 이 풋내 나는 떫음을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우물 밖이 두려워 한 곳에만 머물다보면 편협한 시야와 우매함을 갖게 되듯,인생도 마찬가지라고 본다.남편을 만나 평범치만은 않는 삶을 살아오며,수많은 희로애락(喜怒哀樂)을 겪었다.하지만 지나고 보니 희희낙락(喜喜樂樂)이더라.지독한 목마름 끝에 물 한 방울의 소중함을 알게 되듯 말이다.그래서 군인가족으로서 겪은 모든 것들이 내겐 희희낙락이다.군인가족으로서 내 삶의 신호탄이 된 마현관사에서의 신혼생활은 그래서 더욱 의미가 있는 듯하다.

남편의 주름 덕분에 기분 좋은 타임 슬립을 했으니,난 더 이상 요 주름 녀석들을 뻔뻔하다 미워하지 않기로 결론을 내렸다.그래도 어찌되었건 마냥 반기고 앉아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앞으로 한 50년은 더 남편 얼굴을 보고 살아야 할 텐데 내가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말이다.그동안 고생한 남편이 짠하게 느껴지는 것도 일부 작용했다는 점도 애써 말하고 싶다.그래서 난 달린다.그 유명한 PX 달팽이크림을 사기 위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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