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창수 소설가
▲ 하창수 소설가
보름쯤 전,이른바 ‘백악관 사진 표절’ 논란이 있었다.일부 언론이 청와대에서 진행한 회의장면을 보도하면서 백악관의 회의장면 사진을 보고 그대로 베끼듯 진행했다는 내용을 기사화했는데,청와대에서 회의를 개최한 시일이 백악관보다 빨랐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오보라는 게 밝혀졌다.며칠 뒤엔 이 오보와 관련해 청와대의 부대변인이 자신의 SNS에 “사실에 기반해 뉴스를 전해야 할 기자가 왜 ‘소설’을 쓰느냐”고 불만을 터뜨렸고 여기에 유명소설가가 대변인의 트위터 글에 사용된 ‘소설’이란 단어에 대해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면서,거짓말을 소설과 동일시해서 사용해도 되는가에 대한 논의가 한동안 사람들의 입길에 오르내렸다.

소설과 거짓말을 같은 맥락에서 얘기해도 될까? 나치즘으로 얼룩진 독일의 현대사를 다룬 소설 <양철북>의 작가이며 노벨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했던 귄터 그라스는 어릴 때 자신이 대단한 거짓말쟁이였으며 어머니가 그의 거짓말을 좋아한 덕분에 작가가 될 수 있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얼핏 거짓말과 소설이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처럼 들릴 수 있는 얘기다.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오해를 불식시킬 만한 귄터 그라스의 다른 어록이 있다.“거짓말에는 두 가지가 있다.자신을 방어하거나 남을 다치게 하는 거짓말,그리고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는 거짓말.진실은 대부분 지루한 것인데, 이 지루함을 해소해줄 수 있는 것이 거짓말이며,이때의 거짓말은 누구도 해코지하지 않는다.” 귄터 그라스가 언명한 ‘아무도 해치지 않는 거짓말’이 소설을 지칭하고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우리가 거짓말이라고 알고 있는 그 ‘거짓말’은 대부분 자신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행해지며 이 과정에서 아무 잘못도 없는 누군가를 해치게 된다.자신을 방어하는 것을 넘어서서 오직 남을 헐뜯거나 음해할 목적으로 대놓고 늘어놓는 새빨간 거짓말도 있다.이런 종류의 거짓말을 우리는,국정농단의 법정에서,그 이전의 청문회에서,숱하게 보아왔다.법은 이것을 위증이라는 이름으로 엄벌하지만,엄벌이 아닌 엄포에 그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 또한 우리가 익히 경험한 일이다.분통이 터지는 것은 위증으로 인해 억울하게 혐의가 덮씌워진 애꿎은 피해자가 상상하기 힘든 고초를 겪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거짓말의 이런 추악한 양태를 문학예술의 최전선에 있는 ‘소설’에 대입한다는 건,그 자체로 추악한 일이 아닐 수 없다.하지만 언제부턴가 뻔한 거짓말을 늘어놓는 사람들의 그 ‘거짓말’에 우리는 ‘소설’이란 이름을 붙이곤 한다.“소설 쓰고 있네”나 “소설 쓰지 말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고 말지만,30년 넘게 소설가로 살아온 필자로선 모욕을 당한 느낌을 떨쳐내기 힘들다.독일의 양심이라 불린 귄터 그라스가 농담처럼 던져놓은 ‘진실의 지루함을 해소해주는 거짓말’로서의 소설은,환언하면,‘진실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혹은 진실을 알려주기 위해 사용된 우아하고 뼈저리며 냉혹한 거짓말’이다.누구도 해치기는커녕 인류의 영적각성을 위해 행해지는 소설이란 거짓말이 겨냥하는 것은,어쩌면,진실 너머일는지도 모른다.본질,혹은 마음의 궁극 같은.

한 나라의 지적수준을 드러내는 통계자료 중의 하나 1인당 월평균독서량에서 우리나라가 꼴찌수준이란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미국,일본,프랑스 같은 선진국 국민들은 한 달에 대략 6권 정도의 책을 읽으며,중국도 한 달 평균 2.6권을 읽는다고 자료에 나와 있다.우리나라는 한 권도 되지 않는 0.8권이다.이 0.8권의 책이 소설일 가능성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한 달에 소설책 한 권도 제대로 읽지 않는 국민들에게 거짓말과 소설을 구분해 써달라고 요구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일 성싶다.씁쓸하고,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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