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부러진 팔이 가리킨 경직된 상상력
그런데 이 작품은 아름다움과 행복함으로 감상하기에 좋은 미술이 전혀 아니다.두 아이와 함께 뱀에 휘감겨 고통스러워하는 노인의 얼굴과 뒤틀린 동작이 처절하다.격정과 고통의 순간이 아찔하다.필사적인 손이 뱀의 머리 쪽을 막으려 하지만 뱀은 넉넉히 몸을 구부려 옆구리에 독 이빨을 박아 넣는 것에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팽팽하게 긴장한 근육들에도 곧 독이 퍼질 것이 확실한 상태다.로마의 시성(詩聖) 베르길리우스는 라오콘의 비명이 하늘에까지 닿았다고 했는데,그 표정이 드러나 있다.이 작품은 그런 상황의 묘사가 ‘탁월하고 능숙하다’는 점에서 비로소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라오콘은 트로이 전쟁에 나오는 트로이의 사제였다.그는 그리스의 오디세우스가 내놓은 목마의 계략에 넘어가려는 트로이에 강력하게 경고했다.목마를 성 안으로 들여놓아서는 안 된다,적의 계략이다.라오콘의 경고는 그러나 신들의 뜻에는 반하는 것이었다.그리스 편인 포세이돈이 바다에서 거대한 뱀 두 마리를 보내 신들의 뜻을 보여주고 있다.두 아들과 함께 신의 뜻에 희생당한 의인의 죽음,트로이는 이걸 계기로 십년을 버텨온 성을 함락시킬 이른바 ‘트로이 목마’를 의심 없이 들여놓게 된다.이런 신화 내용에서도 이미,라오콘의 절규에는 표면적인 것 이상의 깊은 울림이 있다.
그렇지만,근대인인 우리는 기어이 트집을 잡고야 만다.두 아이가 조금 이상하다.신체 나이로 봐서는 아버지에 비해 그렇게 작을 리가 없는 것이다.그 둘은 기형인가?완벽한 조형성을 가진 당시의 작가들이 왜 같은 기준과 규격을 맞추지 않았을까?그런데 이런 의심이 근대 이후에 살고 있는 우리의 버릇이다.아버지와 두 아이의 비례가 맞지 않는 것,한 장면에서 다른 두 잣대가 동시에 작용하는 것을 우리는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이건 이제 우리의 병이 되었다.그 병은 실은 르네상스 시대로부터 시작되었다.모든 것이 완벽하게 한 장면으로 장악되지 않으면 그건 ‘틀린 것’으로 규정된다.고대인들이 틀린 것일까,근대를 통과한 우리가 지나친 결벽증에 걸린 것일까?원래 중요한 인물 라오콘과 두 아들은 각각 다른 시공간처럼 조각에서 다룬다고 안 될 일은 아니다.고대 조각에서 헤르메스 팔에 안긴 디오니소스도 너무 작고,아우구스투스 다리 뒤에 매달린 돌고래와 디오니소스 역시 단지 인형 크기일 뿐이다.르네상스 이전 그건 아무런 문제도 아니었다.한 작품이지만 서로 구분해서 보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발굴 당시 라오콘의 오른팔은 발견되지 않았다.미켈란젤로는 몸의 근육을 세심히 관찰한 결과 팔은 구부러져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그러나 작품은 한동안 오른팔을 하늘로 뻗은 모양으로 복원되어 있었다.20세기 중반이 지나서야 그 팔이 지금의 모양대로 발견되었다.잘못된 복원상태로 있던 작품은 이제 발견 당시 팔들이 부러진 상태 그대로 놓이게 되었다.미켈란젤로는 이 주장에 있어서도 역시 옳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 최형순 미술평론가
정선에서 태어나 정선고·강원대를 졸업했다.서울대 미술이론 석사,홍익대 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전북도립미술관 학예실장 등을 역임했다.1998년 구상전 공모 평론상을 수상하고 미술평론가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