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윤

김선생, 여기 인천공항입니다.삼천 원짜리 볼펜을 하나 살까 하는데 가능하겠습니까?

차교수가 갖고 있는 연구비 과제 카드는 총 일곱 개였다.그중에 어떤 카드로 삼천 원짜리 볼펜을 사야하는지 묻는 질문이었다.시간은 월요일 새벽 4시였고 나는 아직 꿈처럼 자고 있었다.그래서였을까.핸드폰 너머로 흘러들어오는 낯선 남자의 음성이 차교수의 목소리라는 걸 알아듣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오전 7시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차교수와 그의 가족은 일찌감치 집을 나섰을 거였다.차교수는 무어라 몇 마디 덧붙이는 것 같았지만 공항의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핸드폰을 내려놓은 뒤 나는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하지만 한번 깬 잠은 쉬 다시 오지 않았다.

평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라고 느낀 건 본능에 가까웠다.지도교수가 휴가를 떠난 마당에 연구원들의 이른 출근은 놀라웠다.교수들의 연구비 관리나 연구 보조업무를 위해 채용된 사무원들은 교수와 같은 방을 쓰거나 교수 밑에서 석·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연구원들과 방을 함께 사용했다.다행히 차교수와 단둘이 있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하지만 채 열 평이 되지 않는 공간을 다섯 명의 연구원들이 사용하고 있는 곳에 억지로 자리를 만들어 끼어 앉게 된 상황은 피할 수가 없었다.제일 먼저 연구실에 도착해 문을 여는 일이 하루의 시작이었다.하지만 오늘 아침은 어딘가 달랐다.나는 조심스럽게 연구실 문을 열었다.일순 웅성거리던 소리가 멈췄다.마치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버린 것처럼 나를 쳐다보는 연구원들의 동작이 부자연스러웠다.그리고는 바닷물이 갈라지듯 나를 중심으로 가운데 길이 생기며 연구원들이 주춤주춤 양쪽으로 나뉘었다.그 순간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엘라였다.기름진 도도한 얼굴에 숨기지 못한 불안한 눈빛이 인상적이었다.엘라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은 놀랍다기보다는 한편의 영화장면을 보는 듯 했다.그만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달까.어떻게 해서 엘라가 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다만 그대로 멈춰있던 연구원들 중 하나가 내게 내민 노란색 포스트잇엔 엘라를 잘 부탁한다는 메모가 적혀있을 뿐이었다.산책시켜야 할 시간엔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어처구니없는 노릇은 그것이 차교수의 필체였다는 사실이었다.지금쯤 거대한 대륙의 하늘을 날고 있을 차교수가 전화를 받을 리는 만무했고 포스트잇을 몇 번이나 들여다 본 들 다른 내용이 적혀있는 것도 아니었다.속절없이 끊어진 전화의 뒷내용이 설마 엘라였던 말인가.차교수의 정신세계는 내겐 한 번도 본적 없는 미지의 세계 같았다.그리고 지금은 그런 나를 가소롭다는 듯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엘라가 내겐 미지의 세계였다.낯선 공간이 몹시 불편하다는 듯 엘라는 끊임없이 입맛을 다셨다.여차하면 머리에 손이라도 얹고 옆으로 쓰러져 기절할 태세였다.물론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엘라였다.누구의 엘라도 아닌 차교수의 엘라.모두의 시선은 이제 나를 향해 있었다.그 시선에 조종이라도 당한 듯 아님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나는 순순히 엘라가 마실 물을 떠왔다.내가 건넨 물을 받아 마신 뒤에야 엘라의 불안한 눈빛은 사그라졌다.연구원들은 그제야 하나둘 자리를 비우기 시작했다.적어도 열 시간 이상은 날아가야 할 차교수의 호출 전화가 올 일은 만무하였으니 몸도 마음도 가벼워질 시간이었다.

열 평짜리 연구실엔 오롯이 나와 엘라뿐이었다.긴장이 풀리기라도 한 것인지 엘라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역시 엘라였다.이 상황에서도 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엘라는 나보다 한 수 위였다.그것이 엘라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차교수의 엘라이기에 가능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내가 알고 싶은 건 단 하나,지금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대한 납득이었다.엘라는 평화로워 보였다.가느다란 목은 여전히 꼿꼿했고 커다란 눈은 다소곳이 감긴 채 꿈이라도 꾸고 있는 듯보였다.얼마나 행복한 꿈이기에 저토록 평화로워 보일 수 있는 것인지 부러운 마음마저 들었다.내게 꿈이라곤 늦잠을 자서 지각하는 꿈이라거나,신발이나 우산 따위를 잃어버리는 꿈,그도 아니라면 낯선 길에 서서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전전긍긍하다 눈물이 터져버리곤 하는 꿈이 전부였다.그러므로 꿈을 꾸고 있는 시간에마저도 내 얼굴에서 엘라같은 표정이 나올리는 없는 거였다.어느샌가 나는 나도 모르게 엘라를 노려보고 있었다.그 바람에 눈 주위 근육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그때였다.푸드득, 하고 엘라가 날아오른 것은.마치 나의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기라도 하다는 듯 자신의 언짢음을 온몸으로 알려왔다.먼지가 날리고 깃털이 날리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몸짓이었다.책상 위에서 공중을 향해 갑자기 푸드득 날아오르더니 두어 번의 날갯짓으로 그대로 연구실 바닥에 착지했다.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우아하고도 안정된 자세였다.그리고는 나를 향해 한껏 목을 비틀어 올려보였다.여차하면 벼슬을 빳빳하게 치켜들고 울음소리라도 내지를 기세였다.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퇴화된 날개로 날기도 하는 것일까.아니면 그냥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뚝 떨어져 내린 것일까.그렇다면 그것을 날았다고 봐야하는 것일까.물론 이것도 저것도 말이 되는 상황은 아니었다.바닥에 내려앉은 엘라는 보란 듯이 연구실 바닥을 쪼아대기 시작했다.쪼아댄다고 쪼아질 바닥이 아님에도 분주하게 시멘트 바닥을 돌아다녔다.연구실 바닥에 그물처럼 엉겨있는 전선들과 연구원들이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삼선슬리퍼는 엘라의 부리를 유혹하기에 충분했다.나는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그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고만 있었다.아무리 생각해도 눈앞의 광경이 현실 같지가 않은 때문이었다.아주 몹쓸 꿈같다고나 할까.하지만 꿈이라면 울어 깨기라도 하겠지만 바닥에 주저앉아 운다고 해서 사라질 광경은 아니었다.그때 엘라가 목을 비틀어 다시 한 번 나를 흘깃거렸다.그리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엘라의 몸에서 흰색 똥이 똑,하고 떨어졌다.나도 모르게 입이 쩍 벌어졌다.엘라가 종종 걸음으로 자리를 옮기는가 싶더니 다시 또 똑 똑,하고 새하얀 똥이 떨어졌다.믿을 수 없었다.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엘라는 깃털에 묻는 먼지라도 털어내려는 듯 부르르 몸을 한번 떨고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새치름한 표정으로 연구실 바닥을 쪼아댔다.기어이 엘라를 캐리어에 쳐 넣어야 하는 것일까.

차교수가 교내 학보 첫 페이지를 장식한 일은 두고두고 회자될 일이었다.대한민국이 주목하는 젊은 과학자 11인 안에 들었던 촉망받는 젊은 과학자였다.생태공학의 밝은 미래를 책임질 차교수가 엘라의 목에 개 목 줄을 달아 교내를 활보하던 일은 충격이었다.머리에 붉은 볏을 이고 퇴화하여 날지 못하는 날개를 푸드득거리며 튼튼한 다리로 종종거리는 엘라를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며 뒤따르던 차교수의 표정은 마치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어린 아이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과 다르지 않았다.아름드리 드리운 나무그늘 아래,문화재로 지정된 낡고 운치 있는 건물 앞을 지나는 엘라와 그 뒤를 따르는 차교수의 모습은 흑백사진으로 찍혀 몇 주간 교내 게시판을 뜨겁게 달궈놓았다.학생회를 비롯해 잡지사 인터뷰까지 한동안 차교수의 인기는 연예인 못지않았다.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아이가 학교 앞 문방구에서 사온 병아리가 병들어 죽지 않고 온전한 성계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연과 생명의 판타스틱함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보니 이젠 자연스레 어엿한 가족이 되었다는 게 차교수의 말이었다.본질은 보지 못하고 겉모습에만 치중하는 사람들의 의식이 좀 더 고차원적으로 변해야한다며 차교수는 개탄해마지 않았었다.하지만 그런 사람들의 관심이 부담스럽기는 했던 모양인지 그 뒤 엘라는 애완견용 캐리어에 담긴 채 차교수의 차 뒷자리에 놓여있어야 했다.

만만할 리 없었다.얌전히 엘라가 캐리어 안으로 들어올 리도 없었고 그런 엘라를 붙잡아 넣는 일도 쉬울 리 없었다.무엇보다 깃털달린 엘라를 맨손으로 잡으려니 생각만해도 몸서리가 처졌다.그 흔한 비둘기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내게 엘라라니.부리와 깃털,심지어 빨간 눈과 쭈글쭈글한 다리마저 내겐 공포였다.하물며 그것이 내 머리 위를 날아간다고 생각하면 아니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이대로 연구실 문을 걸어 잠그고 나가버릴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하지만 저렇게 마구 쪼아대다간 큰 말썽이 일어날게 분명한 일이었다.연구실 곳곳에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한 연구 실적들이 산재해있는데다 엘라의 말썽을 웃겨 넘길 성격 좋은 연구원도 있을 리 없었다.동원할 수 있는 건 동원해보기로 마음먹었다.빗자루,먼지 털이개,음악소리가 나오는 스피커 그리고 고단백질제인 엘라의 먹이까지.부질없다는 듯 엘라는 훨훨 날았다.적어도 내 눈에 그래보였다.마치 신명난 장난이라도 치는 듯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의자 밑으로 들어가선 옆 책상 위로 나왔고 내려앉는가 싶으면 그 위로 날아올랐다.닿는가 싶으면 다리사이로 빠져나갔고 빗자루에 눌렸다 싶으면 어느새 등 뒤에 가 있었다.물론 그때마다 구구구,하는 비명소리도 잊지 않았다.설마 엘라가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어처구니없는 생각마저 들었다.연구실 안을 헤집고 다니는 엘라의 모습이 천진난만하게 즐거워보였던 건 어쩌면 착각일는지도 몰랐다.그런 엘라와 어떻게든 엘라를 잡아넣으려는 내 모습에 헛웃음만 나올 지경이었다.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또 다시 내 안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만 같았다.

- 사당역 6번 출구에서 반경 1km이내에 위치했으면 좋겠습니다.좌식보다는 의자가 좋겠군요.아 김선생,그리고 반드시 일식전문 자격증이 있는 요리사여야 합니다.

타대학 교수와의 저녁 약속을 위해 차교수가 지시한 식당 섭외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선 꼬박 세 시간이 걸렸다.이태원 유명 빵집 앞에서는 한 시간 반을 기다려 빵을 사와야 했고 청담역 로제 와인샵을 찾아내는 데는 두 시간 반이 걸렸다.그때마다 내 몸을 지탱하고 있는 내 안의 어떤 선들이 심하게 꿈틀거리는 기분에 사로잡히곤 했다.그 선을 넘어서는 순간 세상은 순식간에 틀어졌고 징징거리거나 운다고 해서 그 뒤틀림이 바로잡아지진 않았다.늘 선을 넘지 않기 위해 바로잡아야 하는 건 나 자신이었다.많은 걸 생각하고 신중히 선택해야 하는 건 어찌 보면 시간낭비에 불과했으니까.그러니 엘라의 등장을 이해하는 건 애초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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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정신을 차렸을 땐 공중에 떠다니는 엘라의 깃털과 연구실 가득 자욱한 먼지뿐이었다.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여전히 엘라는 연구실 바닥을 쪼아대고 있었다.시간은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있었지만 아무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돌아올 생각이 없는 건지도 몰랐다.지도교수의 한 달 휴가라는 기회는 흔히 오는 게 아니었으니까.그 사이 엘라의 행동은 점점 더 신경질적으로 변해갔다.차교수의 집과는 비교도 안 될 비좁고 더러운 연구실 공간에 자신을 가둬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이냐는 듯 화가 나 보였다.구구구 쪼아대는 태도가 집요해지고 그악스러워졌다.온 몸을 뒤덮고 있는 깃털이 오소소 돋아나 덩치가 한껏 커진 것 같았다.거칠게 부풀어 오른 깃털은 당장에라도 나를 향해 달려들 듯 위화감마저 주고 있었다.하지만 정작 엘라가 공격해야 할 대상은 내가 아니었다.여름휴가를 위해 가족 같다던 자신을 내팽개친 차교수를 향해서라면 모를까.진정한 공격의 대상을 외면한 채 나를 향해 적의를 드러내는 엘라가 못마땅했다.엘라의 비겁함과 소심함에 화가 났다.겨우 찾은 공격의 대상이 나라니.어쨌거나 쓸데없는 신경전은 그만해야 했다.어떻게든 이 대치상황을 종료시켜야 했다.나는 엘라가 눈치 채지 못하게 슬그머니 엘라를 향해 발을 내딛었다.물컹,하고 발이 미끄러진 것은 그때였다.엘라의 똥이었다.하얀 엘라의 똥에 그만 미끄러지고 말았다.재빨리 옆에 있던 의자의 손잡이를 잡는 바람에 넘어지진 않았지만 그 순간 내 안의 선들이 그만 두두둑,끊어져버리고 말았다.순식간에 나를 둘러싸고 있던 세상이 일그러지고 비틀어져 버렸다.끊어져버린 선들은 팽팽하게 당기고 있던 제힘의 탄성으로 인해 허공을 향해 미친 듯이 소리치며 몸부림쳐댔다.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아니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가 맞았다.쿨럭쿨럭,툭툭툭.나를 향해 눈을 부라리며 벼슬을 바짝 세우고 있는 엘라의 목을 움켜쥔 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나는 엘라를 캐리어에 쳐 넣어버렸다.도도한 엘라의 괴성은 천박하기 그지없었고 내 손안에서 바동거리는 꼴은 경박스럽다못해 우스꽝스러웠다.캐리어의 문을 닫는 순간까지도 나는 내가 한 일이 믿기지 않았다.그저 아무것도 기억하고 싶지도 않았고 아무것도 느끼고 싶지 않았다.엘라의 촉감 따위.곤두선 엘라의 벼슬 따위.모든 건 끊어진 선 때문이었다.

캐리어의 무게만도 만만치 않아 몸은 한쪽으로 기울어졌다.누가 봐도 꼴사나운 모양새였다.노란색의 포스트잇에 적혀있는 산책 시간은 이미 한참이 지나있었다.하지만 엘라의 목에 개 목줄은 차마 걸 수가 없었다.더 이상 엘라를 만지고 싶지 않았다.엘라의 산책 시간에 차교수는 몹시 예민했다.마치 정해진 시간의 산책만이 엘라가 흔한 엘라가 아닌 차교수의 엘라가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조바심을 내곤 했다.결국 내가 선택한 건 캐리어를 통째로 산책시키는 거였다.될 수 있는 한 사람들의 이동이 적은 장소를 골랐다.사람들의 눈에 띄고 싶지 않았지만 학교 안에서 그런 장소는 흔치 않았다.눈에 띄지 않는 장소라고 생각할수록 더 눈에 띄게 마련인 곳이 캠퍼스 안이었다.여지없이 한적한 곳은 커플들 천지였다.이쪽 벤치에도 커플 저쪽 벤치에도 커플.더 이상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다닐 수 없어 벤치들 사이의 나무그늘 아래에 캐리어를 내려놓았다.캐리어가 바닥에 내려지자 밖으로 나오려는 엘라의 몸부림이 고스란히 손잡이를 통해 전해졌다.몸집에 비해 캐리어가 작았다.정작 차교수도 엘라가 얼마나 자랄 것인지 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아니면 아무리 판타스틱한 엘라였지만 그래봤자 한낱 문구점에서 산 병아리인데 제깟 게 얼마나 자라겠는가 성장의 한계를 정해버린 것일 거였다.엘라의 버둥거림은 생각보다 길었다.캐리어의 손잡이를 놓은 지 한참이 지나도록 푸드득거리는 엘라의 날갯짓소리를 들어야했다.문득 저러다 날개가 부러져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열심히 뛰어다니다보면 좋은 일이 생기겠지 싶어 뛰어다니다보면 결국 부러지는 건 내 다리일 뿐이었다.부질없는 짓이었다.세상에 부질없는 일이 너무도 많다는 걸 깨닫기엔 엘라는 너무 고상하게 자랐는지도 몰랐다.병아리일 때는 작은 상자가 엘라의 세상전부였을 것이고 그리고 성계가 되어서는 그저 오십 평짜리 차교수의 집이 전부였을 테니까.날개를 푸드득거리거나 몸을 버둥거리는 시늉만으로도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을 삶이란 어떤 것인지 자못 궁금해졌다.

처음엔 개처럼 큰 고양이라고만 생각했다.하지만 개처럼 큰 고양이 서너 마리가 내 주위를,아니 정확히 얘기하면 캐리어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어린 여학생의 갑작스런 돌발행동 때문이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벤치에 앉아 있던 여학생이 어느 사이에 다가와 잔뜩 걱정스러운 얼굴로 캐리어 주변을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있는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여학생은 이미 엘라를 아기라고 부르고 있었다.나도 모르게 캐리어의 손잡이를 다잡았다.더 이상의 선을 넘지 말아주기를 바라는 의도에서였다.캐리어에 꽂힌 여학생의 시선은 흔들림이 없었다.내 뜻을 알아준 건 여학생의 가방을 들고 옆에 서 있던 남학생이었다.자신의 팔을 잡아당기는 남학생의 눈치에도 여학생은 꿈쩍하지 않았다.들고양이들이 아기를 노리고 있다며 여차하면 눈물이라도 흘릴 기세였다.안절부절 못하는 불안한 기색이 마치 내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엘라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마치 이 상황에 신이라도 난 듯 또 다시 엘라가 버둥거리기 시작했다.들고양이들이 엘라를 노릴 일도 만무하겠지만 자꾸 선을 넘으려는 여학생의 태도 역시 이해되지 않았다.나는 먼 하늘만 바라보았다.노골적인 거부의사였다.나는 최선을 다했다.비록 엘라의 목에 줄을 매달아 걸음마를 시키지는 못했지만 이렇게라도 나왔으면 됐다 싶었다.그러니 이제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아무것도.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그러고 싶었다.먼 하늘의 구름이 손에 만져질 듯 가까이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그래서였을까.여학생의 비명소리와 함께 힘차게 푸드덕거리며 뛰어가는 엘라의 모습이 마치 TV에 나오는 화면처럼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만 느껴졌다.여름 햇빛 아래 나무들은 선명한 녹색을 띠고 있었다.비록 기온이 조금 높긴 했지만 덕분에 모든 것이 반짝이며 활기차보였다.아니면 비명을 내지른 여학생과는 다르게 엘라의 뒤를 쫓는 남학생의 발걸음이 너무 재빨라 그 때문에 더욱 활기차보였던 것일까.순식간에 내 앞을 스쳐가 운동장을 내달리는 엘라의 모습은 현실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그리고 그 다음에 펼쳐진 상황은 시트콤도 영화도 아닌 리얼리티한 현실 그 자체였다.

엘라는 순식간에 사라졌다.들고양이들로부터 아기를 지켜주고 싶었다며 훌쩍이는 여학생의 멱살이라도 잡아 흔들고 싶었다.사과를 하며 머리를 조아리는 건 오히려 남학생 쪽이었다.한바탕의 뜀박질로 흘러내린 땀 때문에 이마에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채 정리하지도 못한 상태였다.나와 여학생 사이에서 남학생은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이 역력했다.앙증맞은 애완견을 상상했을 여학생 역시 엘라의 등장에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한여름 햇빛 아래 덤불숲까지는 아니더라도 여러 그루의 회양목이 심어져 있는 낡은 학교 담장을 앞에 두고 나는 이마에 손을 얹은 채 현기증을 참아내야 했다.이글거리는 태양 때문인지 아니면 정신없는 달음박질로 급격히 요동치던 심장박동이 가라앉지 않은 때문인지 서서히 세상이 뒤틀어지는 기분이었다.이상한 나라의 폴이 이상한 나라로 빨려 들어갈 때처럼 찌그러들고 비틀어지며 급기야 세상이 나선형으로 뱅글뱅글 돌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휘말리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무언가 힘껏 붙잡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럴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엘라의 등장에서부터 실종까지 모든 게 거짓말 같았다.아니 어쩌면 오늘 아침 공항에서 걸려온 차교수의 전화부터 현실이 아니었는지도 몰랐다.태양아래 멀뚱히 서 있는 나 자신조차도 정말 나인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모든 걸 부정해도 엘라가 사라진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냥 엘라가 아니었다. 차교수의 엘라였다.

제대로 쫓아왔다면 회양목 덤불에 엘라가 있어야 마땅했다.남학생과 나의 뜀박질이 멈춘 곳은 동일했다.그렇다면 확률이 낮지 않은 게 분명했다.남학생은 왼쪽에서 나는 오른쪽에서 몰아보기로 했다.천천히 엘라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아주 조용히 신중하게 움직였다.자칫 작은 움직임소리에 놀라 달아나버린다면 정말 모든 게 끝이었다.몸을 한껏 낮춘 채 두 눈과 귀에 모든 신경을 모았다.고도의 집중력과 신중함으로 움직였지만 그럼에도 엘라는 보이지 않았다.어디로 숨어버린 것일까.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다리의 힘이 풀리면서 주저앉고만 싶어졌다.남학생의 이마에도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여학생은 어느 결에 사라졌는지 보이지도 않았다.아니 곁에 있다고 해도 멱살을 잡아 흔들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시간은 이미 퇴근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이 시간까지 연구실에 아무도 돌아오지 않은 것일까.찾는 전화조차 없었다.아니면 나 같은 건 잊어버린 것인지도 몰랐다.그렇게 엘라의 실종마저 잊어버려주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엘라는 내가 아니었다.여름 해는 길었다.학교 담장을 따라 몇 바퀴를 돌아도 태양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목덜미로 땀이 흘러내렸다.남학생은 계속해서 말없이 내 뒤를 따르고 있었다.나는 하마터면 남학생의 따귀를 올려붙일 뻔했다.문득 정작 내가 화를 내야 하는 대상은 사라지고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구해주고 싶었다며 제멋대로 선을 넘나든 여학생은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순간 나는 남학생에게 화를 내고 싶어졌다.남학생이라면 내가 질러대는 윽박 따위 고스란히 받아줄 것만 같았다.나는 남학생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고개를 숙인 채 남학생은 묵묵히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아무리 둘러보아도 여학생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그렇게 구해주고 싶었다던 엘라가 사라졌는데도 궁금하지 않은 것일까.나는 남학생의 등짝을 사정없이 후려쳤다.피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우두커니 서 있는 남학생의 모습에 내 안의 무언가가 심하게 꿈틀거렸다.그것은 거세게 튀어나와 사방으로 마구 튕겨져 나갔다.나는 나도 모르게 남학생의 따귀를 올려붙였다.한 대,두 대.몸이 휘청였다.손바닥이 얼얼했다.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쳐다보는 남학생의 눈을 마주하자 그만 툭,하고 심장이 내려앉았다.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가.

남학생을 돌려보낸 뒤 나는 벤치에 앉아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이제 조금 있으면 차교수가 독일 공항에 내릴 시간이었다.전자기기 사용 제한이 풀리면 제일 먼저 내게 전화를 걸어 엘라의 안부를 물을 것이었다.정해진 시간에 산책은 시켰는지 그리고 정해진 용량의 먹이를 주었는지.자신의 안부를 물을 거라는 걸 엘라는 알고 있었을지도 몰랐다.어쩌면 엘라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수가 높은지도 모를 일이었다.자신의 성장에조차 한계를 두었던 차교수에게 한방 먹이고 싶었는지도 몰랐다.우아하지만 비좁은 캐리어와 단백질 과잉으로 흰 똥 밖에 쌀 수 없는 식사를 못견뎌했을지도 몰랐다.그래서 사라져버린 것인지도.나는 빈 캐리어를 들고 천천히 벤치에서 일어섰다.언제까지고 그렇게 앉아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텅 빈 캐리어는 분명 가벼워야 했지만 나는 도무지 가볍게 느껴지지가 않았다.학생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며,수위실 아저씨들이 기다란 막대기를 들고 뛰어다니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던 것은 정신이 나가 있었던 탓이 분명했다.나도 모르게 소란이 이는 웅덩이 쪽으로 몸을 튼 건 정말이지 알 수 없는 어떤 이끌림 때문이었다.예전엔 나름 이 대학의 명소였지만 새로운 강의동을 세우는 바람에 절반이상이 흙으로 매워져버린 물웅덩이였다.반쪼가리 물웅덩이는 각종 쓰레기를 떠안은 채 이제 악취만 풍기고 있을 뿐이었다.남은 절반마저도 다음 학기에 매워질 것이라는 소문이 가득한 곳이었다.그 악취 풍기는 반쪼가리 물웅덩이 위에 둥둥 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엘라였다.학생들의 신고로 수위실 아저씨들이 막대기를 들고 엘라와 신경전을 벌이고 있던 참이었다.온 몸에 검은 쓰레기 찌꺼기를 잔뜩 묻힌 엘라는 가히 기함할 모습이었다.도도하게 치켜세우던 벼슬이며 나를 향해 한껏 부풀려보였던 깃털은 흠뻑 젖은 채 온 몸에 아무렇게나 척척 감겨있었다.무언가를 주워 먹기라도 하는지 연신 입맛을 다시며 부리를 가만두지 않는 모습은 열의에 가득 차 보이기까지 했다.새치름했던 눈동자는 어느새 초롱초롱해져 있었다.비좁은 캐리어에 몸을 맞춘 채 반쯤 감은 눈으로 우아하게 차교수의 뒷자리에 앉아 있던 엘라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저토록 천진난만한 모습의 엘라라니.정말 엘라가 맞긴 한 것인가.나는 몇 번이나 눈을 비비고 쳐다보았다.좁고 지저분한 연구실이 가당키라도 하냐는 듯 금방이라도 이마에 손을 올린 채 쓰러질 듯 고고했던 엘라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새로운 세상을 만난 듯 첨벙첨벙 물장구를 치며 흥에 겨운 엘라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코가 시큰해졌다.기다란 막대기를 들고 수위실 아저씨들이 우왕좌왕하는 동안에도 나는 멍하니 엘라의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다.핸드폰이 울렸다.차교수였다.나는 악취 나는 물웅덩이를 향해 손에 들고 있던 텅 빈 캐리어를 힘껏 던졌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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