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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순의 미술평론] 어린왕자가 산사를 찾은 까닭

시간이란 그릇에 담긴 눈에 보이지 않는 ‘진정성’

최형순 2018년 10월 13일 토요일
거대하게 조각된 어린왕자가 경남 양산에 있는 통도사(通度寺)를 찾았다.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가 어떻게 우리의 고찰(古刹)에 가게 되었을까.미술이 소비되는 방식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전시라는 형식이다.19세기 이래 그것은 특별한 전시 공간,즉 미술관이나 갤러리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관례가 됐다.그런데 진보적 입장은 차츰 이런 관례들을 깨고 하나씩 새로운 가치를 찾아가게 된다.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의 긍정적인 면도 바로 이와 같은 관습 사슬로부터의 탈주일 것이다.엄숙한 통도사 경내 전시는 그렇게 일단 파격적이다.

통도사는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천년이 넘는 고찰이다.가장 중요하고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우리나라 불법승(佛法僧)을 대표하는 삼보(三寶)사찰의 하나다.자장율사가 가지고 온 진신사리를 모신 곳이 불보(佛寶)사찰인 통도사다.그리고 팔만대장경이 있는 법보(法寶)사찰 해인사,유명한 스님을 많이 배출한 승보(僧寶)사찰 송광사가 있다.세계문화유산에는 ‘산사,한국의 산지승원’이란 이름으로 등재됐다.그 기념으로 이 조각 작품전을 열고 있다.

▲ 경남 양산 통도사 일주문 옆에 전시된 강원출신 이영섭의 작품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
▲ 경남 양산 통도사 일주문 옆에 전시된 강원출신 이영섭의 작품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
일주문 앞에는 풍화되어 구멍이 숭숭난 퇴적암 형상으로 거대한 어린왕자가 입구 양쪽에 버티고 서 있다.동화 같은 상상은 크면 클수록 좋을 것이다.이 조각을 만든 작가 이영섭(강원출신)은 어린왕자의 시각이 불교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 열반경의 가르침과 닿아있다는 것이다.“어른들은 누구나 처음에 어린이였다.하지만 그것을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다.”어린왕자가 말하고 있는 것은 오랫동안 잊고 살아온 본래의 품성을 되새기게 한다.그렇게 우리 안에 간직된 순수한 마음을 찾아보고자 했다.신라 선덕여왕 때에 창건해 올해로 1373주년을 맞는 이 전통의 고찰이 이영섭의 조각 어린왕자 전시를 여는 이유이기도 하다.여우가 밀밭을 찾았을 때 어린왕자의 빨간 머리를 회상하는 장면이 있다.그렇게 먼 훗날 어른이 된 자녀들이 통도사를 통해 부모님과 함께 했던 소중한 시간을 그리워하는 아름다운 인연을 만들어주고 싶은 것이다.

거친 퇴적암 조각 작품의 표면을 보면 거대한 바위로 솟아오른 전북 진안의 마이산이 떠오른다.지구 역사 전체로 보면 지표면은 그야말로 찰흙처럼 주물러져 여러 형상을 빚어왔다.깊은 바다가 물의 무게로 눌러 만든 퇴적암이 산꼭대기에 가 있는 경우도 흔하다.특별히 뾰족하게 솟아 말의 귀를 닮은 마이산은 그래서 더 신비롭다.전체가 자갈이 뒤섞인 퇴적암의 일종인 거대한 역암으로 이루어져 있다.폭격을 맞은 듯 군데군데 동굴 같은 표면을 가진 마이산의 바위 덩어리와 이런 어린왕자 조각의 표면은 똑같이 닮은 질감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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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섭 조각품의 질감은 그가 창안한 고고학적 ‘발굴’이라는 방법에서 나왔다.본격적인 조각 작가의 길을 위해 그가 찾아간 곳은 당시 발굴이 한창이던 폐허가 된 고달사지(高達寺址) 옆이었다.산골 깊은 곳 폐가에 홀로 들어가 있던 그에게 수백 년 전의 유물들이 발굴되는 현장은 깊은 인상을 주었다.고고학자와 달리 오늘을 살고 있던 이 예술가는 그 오랜 시간을 압축해 작가 스스로가 묻고 파내는 발굴 작업을 단행하기로 한다.마침 그가 머물던 곳 마당은 결이 고운 마사토로 이루어져 있었다.그곳에 거꾸로 형태를 새겨 파고 그 속에 온갖 재료를 쏟아 붓고 굳혀서 파내는 발굴을 시작했다.20여 년 전의 일이다.이제 그 조각품은 금빛을 입은 석영이 박히거나 다이아몬드가 바위에 섞인 암석과 같은 표면을 보여주는 것도 가능해졌다.자개 파편이 박혀있는 바위 같은 조각품도 만들어낸다.

조각가 이영섭은 어린왕자를 세계 곳곳에 묻고 꺼내는 작업을 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그런 거대한 프로젝트로는 크리스토가 세계를 돌며 벌였던 대지예술(大地藝術)의 예가 있다.미국 서부에서 태평양까지 몇 십 킬로미터를 이어 닿게 달리는 울타리,베를린 국회의사당 건물 전체를 몽땅 천으로 포장해 버린 것,파리의 퐁뇌프 다리를 다 감쌌던 것처럼 말이다.미국의 대표 작가 라우센버그가 세계를 다니며 각각의 문화 속에 깊이 들어가 자신의 회화 방법을 실험했던 ROCI(Rauschenberg Overseas Culture Interchange) 투어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그러니까 세계에 묻고 ‘발굴’해내는 어린왕자의 첫 번째 유명 장소가 바로 이번에 한국의 통도사가 된 셈이다.그런 여러 이야기가 어린왕자와 통도사의 인연을 제법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 최형순 미술평론가

정선에서 태어나 정선고·강원대를 졸업했다.서울대 미술이론 석사,홍익대 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전북도립미술관 학예실장 등을 역임했다.1998년 구상전 공모 평론상을 수상하고 미술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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